프로그래머와 휴식 :: 2008/02/29 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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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한주 괌 PIC에 다녀왔습니다. 가끔 가까운 데 아이들을 데리고 놀러갔다 올 때는 있었습니다만, 제 돈을 주고 이렇게 오랫동안 쉬어본 것은 처음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사박오일동안 많은 생각이 들더군요.




제가 프로그래머로서 코드를 잡고 일을 한 지가 벌써 십수년 가량이 흘렀습니다. 그 동안, 저는 의식적으로 휴식을 회피하면서 살았습니다. 거기에는 제가 하는 일의 성격이 한 몫을 했습니다. 사실 프로그래머라는 사람들은 컴퓨터가 놓인 자리에 앉아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죠. 단기적으로 보면, 대단한 육체적 강인성을 요구하는 직업도 아닌데다, 손가락 놀릴 힘만 있으면 그다지 큰 피로감없이 하루 종일을 컴퓨터 앞에서 보낼 수도 있습니다. 생각해 보니까, 저도 최근 한 십년 가량은 거의 그런 상태로 살았던 것 같습니다.
예전에 마이크로소프트웨어라는 잡지를 구독했던 적이 있는데요. 초창기 기사중에 프로그래머의 책상 위 풍경을 묘사한 대목이 있었습니다. 아무렇게나 구겨져 뎐져 있는 서류 뭉치, 필요할 때면 아무때나 손을 뻗어 마실 수 있는 음료수, 키보드, 마우스, 매뉴얼, 그리고 플로피 디스크들... 사실 지금도 대부분의 프로그래머들은 이런 책상 앞에서 일을 하고 있을 겁니다. 프로그래머들의 생활 패턴이라는 것이 그다지 많이 바뀌지 않았으니까요. 프로그래밍이라는 것이 갖는 창의적인 속성이 큰 만큼, 그 앞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가장 재미있는 일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프로그래머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보면 책상은 여지없이 어지러워지고 말지요.
그런데 이런 생활을 오랫동안 하다 보면, 프로그래밍 이외의 다른 모든 활동들에 대한 자신의 태도가 좀 이상하게 바뀌게 된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가령 일을 하다가 하루 쉬어도 되는 날이 생겼다고 칩시다. 그런데 그 쉬는 날이 어쩐지 영 탐탁치 않게 느껴진다는 겁니다. 안그래도 업무가 바쁜데, 하루를 쉬면 그 업무를 좀 더 빨리 처리할 수 있을 시간을 날려버리게 되는 것 같이 느껴지는 것이죠. 그러다 보면, 다른 사람들이 전부 휴가를 내고 자리를 비웠다 할지라도, 회사에 나와 업무를 보게 되는 일이 많아집니다. 팀원 중에 누군가가 하루 같이 시간을 내서 어디 바람이라도 쐬러 가자고 하면, "이렇게 바쁜데 놀자니, 제정신인가?"하는 마음이 들어 기분이 좋지가 않죠. 어쩐지 그 사람은 팀 전체 생산성에 악영향을 주는 사람 같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 이야기는 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저는 이런 생활을 십여년 동안 하면서, 단 한 번도 제 자신이 '소비되고 있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습니다. 아마 거기에는 '하루라도 빨리 돈을 벌어야 한다'는 식의 경제적 강박관념과, '이렇게 놀고 있어서는 분명 뒤쳐질 것이다'라는 불안감도 한 몫을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 37세가 된 제 자신을 돌아보면, 저는 분명 제 자신을 조금씩 갉아먹었던 것 같습니다. 체중은 조금씩 늘었고, 머리는 희끗희끗해지기 시작했으며, 젊은 나이에 녹내장을 앓고 있고, 속이 좋지 않아서 탄산음료나 차가운 물은 거의 엄두도 내질 못합니다. 그리고 건강 문제는 제쳐두고라도, 저는 그렇게 살아온 시간 동안 스스로 기꺼워할만한 멋진 업적 하나도 만들어 내질 못했습니다.
진부한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휴식은 재충전의 기회입니다. 인간에게도 충전지와 비슷한 구석이 있어서, 재충전이 없이는 이전 수준으로 생산성을 되돌리는 일이 불가능 할 때가 생깁니다. 잠을 자지 않고서도 위대한 업적을 만들어 낼 수 있겠지만, 그런 상태는 오래 지속될 수 없습니다. 거기다, 쉬지 않는 사람은 나중에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큰 문제를 만들어 내기도 합니다. 술을 마신 상태에서 만든 코드가 나중에 너덜너덜해지는 것과 비슷한 이치죠.
휴식은 어떻게 보면 "나는 내 자신에게 얼마나 관대한가"의 지표이기도 합니다. 자신에게 관대하지 않은 사람은, 타인에게도 관대할 수 없습니다. 타인에게 관대하지 않은 사람은 종종 팀웍을 해치고, 그런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팀 전반의 퍼포먼스를 떨어뜨리기도 합니다. 저는 지난 사박오일간, 지난 십년간 제가 제 자신에게 얼마나 무자비했던가를 깨달았습니다. 앞으로 프로그래머로 일할 날이 몇 년이나 더 남아있을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앞으로는 제 자신에게 좀 더 관대해 져야 할 것 같습니다.
다만, 코드에게까지 필요 이상으로 관대해질 필요는 없겠죠.
자신에게는 관대하게, 그리고 코드에게는 냉철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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