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여러분이 아는 사람들과 아무런 관련이 없음을 밝혀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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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라는 회사에 박시애라는 약간은 촌스러운 이름을 가진 프로그래머가 있었습니다. 촌스러운 이름을 가진 여자가 오히려 빼어난 아름다움을 가진 경우가 많듯, 그녀도 아름다웠습니다. 어느 정도였냐 하면, 그녀가 정각 열두시에 책상을 정리하고 점심을 먹으러 가기 위해 일어설 때 같은 층의 모든 총각 사원들이 동시에 우루루 일어설 정도였습니다.
그렇다고 그녀가 일을 못하냐 하면 그건 아니었습니다. 신은 한 사람에게 여러가지 재능을 주지 않는다고 하던데, 그 말도 그녀를 두고 본다면 허언이었습니다. 그녀가 Java, C++에 무불통달해 있고, 취미로 Ruby 프로그래밍을 하는가 하면, 주말에 가끔 재미삼아 Erlang 스터디를 하기도 한다는 소문이 회사 내에 쫙 퍼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A 사의 프로그래머 사이에서는 주기적으로 대안 언어 열풍이 불었습니다. 그녀와 같이 일을 하는 부서의 경우에는 그 정도가 더 심했습니다. 여느 개발사 처럼 A사에도 남자 프로그래머의 비율이 월등히 높았는데, 아시다시피 남자들은 자존심이 무척 강한 종족이죠. 모두들 그녀에게 꿀리는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했습니다. 그러니 '그녀가 무슨 무슨 언어를 배운다'는 소문이 들리기만 하면, 다들 경쟁적으로 입문서를 구입하곤 했던 것이죠.
이런 소문도 돌았습니다. 여섯달로 예정되어 있던 프로젝트가 한 개발자의 실수로 데드라인 한 달을 남겨둔 시점에서 계약을 지키지 못할 위기에 처하자, 그녀가 뛰어들어 모든 사태를 한 달 만에 수습해 버렸다는 소문이었죠. 그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그녀의 능력에 혀를 내둘렀습니다만, 한편으로는 시기심에 치를 떨기도 했습니다.
특히 그녀를 시기한 사람은 바로 옆 팀에 근무하던 안이태라는 수석 프로그래머였습니다. 그는 그 회사에서 가장 오랜 시간 동안 근무한 프로그래머이자 회사 창립 멤버였습니다. 그의 별명은 안 프로였죠. 일이라면 물불을 안가리고 어떻게든 끝내고야 마는 그의 프로페셔널리즘을 존경한 후배들이 붙여준 별명이었습니다.
그는 박시애를 직접 면접한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박시애가 초라한 이력서를 들고 (그녀의 학력은 그다지 높은 편이 못되었습니다) 면접장에 들어섰을 때, 그는 그녀 앞에 알고리즘 하나가 적힌 A4지를 내밀었습니다. 그가 미처 질문을 던지기도 전에, 그녀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Practical Programming 2nd Edition에 나오는 예제군요?"
같은 자리에 있었던 다른 심사위원들에 따르면, 'Practical...'로 시작하는 그녀의 발음은 그야말로 원어민의 그것에 다름 없었다고 합니다. 결국 그녀는 만장일치로 채용되고, 입사한지 일년 만에 선임 프로그래머로 초고속 승진하게 됩니다.
그 당시에만 해도 그녀의 앞길에 무슨 문제가 생길 것이라고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그녀가 입사한 지 정확히 2년이 되던 날, 야근을 마치고 총총걸음 차로 걸음을 옮기던 그녀를 막아서는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안 프로였습니다.
"저랑 잠시 이야기 좀 하실까요?"
두 사람이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만, 당시 주차장에서 차에 시동을 걸어두고 담배를 한대 피우려다 엉겁결에 그 장면을 목도한 한 개발자의 전언에 따르면, 상황은 대략 다음과 같았습니다.
분위기가 좀 심상찮더라구요. 안 팀장님이 그분 팔을 붙잡고 뭔가 십분 동안 이야기를 했어요. 가끔 목이 메인다는 표정으로 말을 멈추기도 하고, 격하게 고함치듯 이야기를 하기도 했죠. 어쨌던 평소와는 달리 넋이 나간 표정이었습니다. 반면 박선임님은 표정에 변화가 별로 없었어요. 물론 그것도 평소와는 다른 모습이긴 했죠. 평소 박선임님은 표정 변화가 풍부한 분이었으니까... 어쨌든 그 십분 남짓 되는 대화는 안 팀장님이 뺨을 맞으면서 끝이 났습니다.
나중에 박시애씨가 입사 동기와 술자리에서 털어놓은 후일담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옵니다만, 안 팀장은 그녀가 입사할 당시부터 그녀에 대한 연모의 감정을 품었던 모양입니다. 물론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연모의 감정을 품기 시작한 사람은 안 팀장 말고도 몇이 더 있었습니다만, 그걸 겉으로 내비친 사람은 안팀장이 처음이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회사 내에서 박시애씨는 일을 제외한 다른 것들 - 그러니까 남자 동료들이 자신에게 보이는 관심 - 같은 것에 철저히 무덤덤했거든요. 특히 프로그래밍 언어를 제외한 다른 것들에는 거의 백치에 가까울 정도의 인지력을 보여주곤 했죠. 어떤 남성의 관심도 친절 이상의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았고, 본인의 성적 매력도 거의 깨닫지 못하는 모습이었습니다. 물론 많은 남성들은 그녀의 그런 부조화스러운 모습 - 지적 능력이 수반된 외적 아름다움에 슬며시 끼어든 중성에 가까운 성적 아우라 - 에 열광하곤 했죠. 극히 일부이긴 하지만, 그녀를 흠모하는 여사원들도 몇명 있긴 했습니다.
어쨌든, 안팀장은 그녀의 그런 껍질(이라고 불러야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에 도전한 첫 번째 남성이었습니다. 안 팀장이 고른 상대가 다른 여자였으면 상황은 아마 백팔십도 달랐을 지 모릅니다. 안 팀장은 A 회사 내에서는 성공한 남성 프로그래머의 롤 모델이었으니까요. 아무려나, 안 팀장은 거절당했고, 그 때 부터 그의 시기심은 활활 타오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일단 불이 붙은 시기심은 흔히 세상의 모든 시기심들이 그렇듯, 엉뚱한 방향으로 삐뚤어져 자라기 시작했죠.
당시 안팀장은 그녀가 속한 프로젝트의 제품 책임자(Product Owner)였습니다. 보통 제품 책임자는 외부로부터 오는 요구사항 변경을 적절히 통제하고, 모든 팀원이 불편없이 개발에 몰두할 수 있도록 상황을 관리해 나가는 역할을 맡습니다. 안 팀장은 자신이 가진 그 권한을 굉장히 교묘하게 이용했습니다. 일례로, 그는 그녀가 퇴근하려고 가방을 꾸리려는 순간에 [긴급]이라는 딱지를 붙여 변경된 요구사항을 모든 팀원에게 메일이나 사내우편으로 날리곤 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그는 그녀가 정시에 퇴근하는 것을 막았죠. [긴급]이라는 바로 그 단어로 말입니다.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시스템의 전체 아키텍처에 굉장히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요구사항이 있었는데, 그 요구사항을 거의 2달간 의도적으로 숨긴 것이었죠. 2달이 지난 뒤에, 안팀장은 고객사의 부름을 받고 B사로 출장을 떠납니다. (가짜 출장이었습니다.) 출장에서 돌아온 뒤, 그는 바로 그 요구사항을 꺼내놓았습니다. 개발이 이미 상당 부분 진행된 후였기 때문에 모두가 경악했습니다. 특히 프로젝트 초기에 스파이크 솔루션을 만들었던 박시애씨가 가장 크게 충격을 받았죠. 결국, 모두가 일주일간 밤을 새면서 시스템 구조를 변경해야만 했습니다. 그녀가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냄새를 맡은 것도 그때부터였죠.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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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화에 바탕을 두신 건가요? 흥미진진하네요. 다음 글도 기대됩니다. ^^
2009/01/17 18:11 [ ADDR : EDIT/ DEL : REPLY ]간만에 뵙네요... 반갑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셨는지... ^^
2009/01/18 01:14 [ ADDR : EDIT/ DE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