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프로그램에서 보이는 좋지 못한 징후들을 '나쁜 냄새'라고 합니다. 그녀는 프로그램에서 나는 이런 나쁜 냄새를 감지하는 능력이 탁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녀의 동료들은 가끔 그녀를 '개코'라고 불렀습니다. 그녀의 눈부신 외모에 비추어 보면 분명 어울리지 않는 별명이었습니다만, 그녀는 그 별칭을 너무 좋아했습니다. 그녀가 선임이 된 지 1년 후에 입사한 한 후배는, 저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CI 서버 구축 작업이 끝난 지 한달 뒤 쯤이었을 거에요. 다들 프로그래밍 작업에 여념이 없어서 하루종일 들리는 소리라고는 키보드 또각거리는 소리밖에 없을 지경이었죠. 그런데 어디선가 아주 낮은 톤의 중얼거림이 들려 왔어요. 마침 일에 집중이 잘 안되던 차여서 그 소리가 어디서 나는지를 따라가 보았죠. 박선임님 자리였어요. 평소에는 아주 조용히 일에만 전념하는 분이라 무슨 혼잣말을 그렇게 하시나 싶어 귀를 쫑긋 세우고 들었는데, 글쎄 의자에 기대 눈을 감은 채로 이렇게 중얼거리시는 거에요. "나는 개코다, 나는 개코다, 나는 개코다..." 나중에 둘만 있게 되었을 떄 왜 그러셨나 물어보았더니, 얼굴을 살짝 붉히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응, 그날따라 내 코드가 어떻게 잘못된 건지 통 감이 안와서..."
하지만 그런 그녀도 자신의 인생에서 풍기기 시작하는 나쁜 냄새에는 무력했습니다. 분명 무엇인가가 잘못되어 가고 있었지만, 어디서부터 꼬였는지는 도통 알 길이 없었죠. 안팀장이 만일 조금만 더 허술한 사람이었다면 그녀도 일찍 눈치를 챌 수 있었겠지만, 그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교묘했습니다. 겉으로는 젠틀하고 너그러우면서도 냉철하다는 평판답게 행동했지만, 속에는 '치밀하게 계획된 비열함'을 감추고 있었던 것이죠.
결국 그녀는 조금씩 피로해지는 자신을 무력하게 지켜봐야만 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맡은 프로젝트들이 불행하게 끝났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녀의 책임감 덕에, 그녀가 맡은 프로젝트들의 90%는 성공적으로 끝났습니다. 그녀의 자리에 늦은 시간까지 불이 켜져 있는 날이 늘어갔지만, 윗 사람들은 만족했습니다. 90%라는 줏자가 주는 경이적인 느낌에 사로잡힌 그들의 후각도 날이 갈수록 마비되어 가고 있었던 것이죠. 아무도 그녀 주변에서 풍기는 '나쁜 냄새'를 맡지 못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그녀가 그 '나쁜 냄새'를 그냥 두고만 보았던 것은 아닙니다. 그녀는 그 징후에 최선을 다해 저항했습니다. 애자일 프로세스에 천착하기도 하고, TDD를 더 강화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여러가지 조치들은 코드를 만지는 그녀의 손끝에 때로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곤 했습니다. 하지만 오래가지는 못했습니다. 나쁜 냄새의 근원은 프로세스가 아니었으니까요. 결국 그녀는 2년 3개월 만에 나가떨어지고 맙니다. 회사에 3개월 휴직을 신청한 것이죠. 물론 회사에서는 난리가 났습니다.
박선임이 휴직신청서를 내자 이사님 세분이 회의실에 모였습니다. 모두들 심각한 표정이었죠. 제가 회의살 바로 옆 자리라 목소리도 조금씩 들렸는데, 그 톤이 표정만큼이나 심각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박선님을 팀장으로 승진시켜 새로운 프로젝트를 진두지휘시킬 거라는 소문이 돌고 있었는데, 그 소문이 사실이었던 겁니다. 그 프로젝트는 기한이 6개월로 워낙 촉박했거든요. 이미 계약도 끝난 상태였는데 박선임이 3개월을 쉰다고 하니 난감했었겠죠. 프로젝트가 박선임 전문 분야이기도 했고... 어쨌든 이사님들은 박선임을 한 번 설득해 보기로 가닥을 굳힌 듯 했습니다.
이사진들은 박선임을 즉각 팀장으로 승진시키기로 합의하고, 박선임에게 보름 간의 유급 휴가를 주기로 결정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알면 곤란할 몇 가지 제안도 하죠. 박 선임이 휴가 기간 동안 여행을 할 경우, 모든 여행 경비를 회사가 부담한다는 조건도 그 중 하나였습니다. 어쨌든 이사진들은 박선임을 회사에 묶어놓기 위해 안간힘을 썼습니다. 그러자 박선임은 의외의 결정을 내립니다.
"휴직 신청은 하지 않겠습니다. 대신..."
"네. 말해 보세요."
"앞으로 스무 하루 동안은 회사에 나오되 누구의 지시도 받지 않도록 해주세요, 이사님."
그녀의 말투가 너무 얼음장같아서, 김이사는 '그러게' 이외의 다른 대답은 할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회사 입장에서 보아도, 6개월 중 1개월을 잃을 뿐이니까 큰 손해는 아니었습니다. 거기다 회사에는 나오겠다고 하니, '사람들이 급한 일을 부탁하면 설마 거절이야 할 까' 하는 얄팍한 기대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첫 날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정확히 아홉시에 회사에 출근했습니다. 평소의 그녀 습관으로 보자면 업무 태만입니다만 (그녀는 늦어도 8시에는 출근하곤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없었을 겁니다. 그녀는 이제 팀장이었으니까요. 새 프로젝트에 투입될 팀원들이 자리를 옮기기 시작했고, 그녀는 그들 모두의 자리를 꼼꼼히 챙겨주었습니다.
누구의 지시도 받지 않았지만, 그녀는 모든 일이 순조롭게 굴러가도록 사람들을 매끄럽게 조율해 나갔습니다. 하지만 스스로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코딩도 하지 않았다'고 해야 맞으려나요? 얼마 전 까지 그녀가 하던 일이 무엇이었나를 생각해 보면 기이하게 느껴질 정도로, 프로그래밍에서는 한 발 물러나 있었습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하기 싫어하는 잡일들을 맡아 대신 처리해주곤 했죠. 복사하기, 토너 갈기, 운영체제 설치하기 등등이 그녀가 만 스물 하루 동안 주로 하는 일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공식적으로 '누구의 지시도 받지 않고' 일을 할 수 있는 마지막 날이 되었습니다. 마침 그 날, IDC에 설치되어 있던 서버 중 한 대가 죽는 일이 생겼습니다. 시험적으로 운영되고 있던 서버였고, 프로젝트와 직접적으로 연관 되어 있는 서버도 아니라서 급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 서버의 담당자가 자기 팀에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녀는 기꺼이 IDC에 대신 출장을 나가겠다고 자원했습니다. 물론 담당자는 어쩔 줄 몰라 했죠. 응당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을' 팀장이' 하겠다고 나섰으니까요. 만류하는 그에게, 그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도 그런 일 해 봤어."
그리고는 시리얼 케이블과 여분의 하드 디스크를 주섬주섬 챙겨, 사무실을 나섭니다. 그런 그녀를, 모두들 멍하니 쳐다만 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다음 글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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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 다음편이 너무 궁금하네요... 빨리 올려주세요 ^^;
2009/01/19 19:24 [ ADDR : EDIT/ DEL : REPLY ]재미있게 봐주셨다니 감사... 근데 하루에 한번 정도 밖에 쓸 여력이 안되서 죄송합니다. ^^;
2009/01/19 19:54 [ ADDR : EDIT/ DEL ]다음 글이 궁금합니다...ㅎㅎ 좋은글 항상 감사드립니다.
2009/01/20 10:07 [ ADDR : EDIT/ DEL : REPLY ]들러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랫만에 뵙는듯...
2009/01/20 10:17 [ ADDR : EDIT/ DEL ]너무 재밌습니다. 1편만 보고 못 봤던 거 휴일날 몰아서 보고 있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계속 연재해 주세요~
2009/01/24 12:35 [ ADDR : EDIT/ DEL : REPLY ]감사합니다. ^^; 안그래도 지금 몇줄 또 적던 중인데, 손가락에 요즘 통증이 심해서 진도가 잘 안나가네요. 키보드를 또 다른 것으로 바꿔야 할지... 손목도 영 시원치 않네요. :-( 설 뒤에야 뵐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2009/01/24 12:41 [ ADDR : EDIT/ DE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