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아리송한 평가에도 불구하고, 그는 어렵지 않게 다음 직장을 잡았습니다. 농담삼아 친구들이 "정말 그 직장 삼년만에 망하는 거 아니야?"라고 하기도 했습니다만, 새 직장에 임하는 그의 각오는 담달라 보였습니다. 이전 직장들이 연이어 망한데 대한 부채의식 같은 것이 그의 맘에 남아 있었던 탓이겠죠.
새 직장은 통신 프로토콜을 만드는 회사였습니다. 통신 장비를 생산하는 회사나 연구소가 주 고객인, 설립된지 얼마 되지 않는 자그마한 회사였습니다. 큰 돈은 벌지 못할 것 같았지만, 적어도 쉽게 망할 것 같지는 않아 보였죠. 그리고 이 회사에서, 남기수는 그야말로 고기가 물을 만난 듯 능력을 발휘하게 됩니다. 당시 그를 스카웃했던 연구소장의 말을 빌려보겠습니다.
신기한 놈이었습니다. 별로 일을 열심히 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 돌아서면 일이 끝나 있곤 했죠. 물론 그가 만든 프로토콜이 100% 완벽하진 않았을 겁니다. 타협적인 결정(trade-off decision)을 내리는 것도 많이 봤죠. 하지만 그 친구가 만든 프로토콜이 연동 시험에서 문제를 일으킨 것은 본 적이 없습니다.그를 아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런 말을 전해들으면 심드렁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왜냐고 물으면, 통신 프로토콜 개발에 한 번이라도 발을 담가 본 적이 있는 개발자는 대부분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통신 프로토콜 개발은 RFC만 보면 가능합니다. 고객하고 만날 일이 별로 없죠. 요구사항이 변할 일이 별로 없다는 뜻입니다. 그 친구 성격을 봤을 때, 아마 그런 일이 가장 적성에 맞을 겁니다. 생색내기도 쉬울 거구요.
어쨌든, 그는 그 회사에서 2년 남짓 생활합니다. 2년 동안 네 개의 프로토콜 구현에 참여했고, 이 프로토콜은 대부분 국내에서 만들어진 프로토콜 스택 치고는 널리 쓰이는 것들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회사는 망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회사를 나올 수 밖에 없었죠. 가끔 그는 '망하기 전에 나왔다'고 퇴사할때의 상황을 에둘러 말하곤 했습니다만, 회사가 나름대로 궤도에 올라가고 있는데도 그만두어야 했던 속사정은 조금 복잡했습니다.
퇴사할 당시, 남기수는 두 살 어린 금융업계 종사자와 사귀고 있었습니다. 사직서를 쓰던 날, 그는 그녀를 불러 내어 저녁을 샀습니다. 그리고는 퇴사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녀는 물었습니다.
"...왜?"
"글쎄... 나도 잘 모르겠다. 그냥 같이 일하기가 싫어. 짜증나구."
"왜 그렇게 된 것 같아?"
"음..."
그는 그녀의 질문에 한참을 생각했습니다. 아마 답을 찾기가 어려웠을 겁니다. 제 경우로 보자면, 같이 일하는 사람과 틀어져서 회사를 나와야 하는 경우가 최악이었습니다. 특별한 이유도 없는데, 얼굴을 보면 신경질이 나고 일할 맛이 떨어지는 거죠.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당시 그도 아마 그런 상태였을 겁니다.
"글쎄... 잘 모르겠다."
"오빠 그거 알아?"
"뭐?"
"특별한 이유가 없이 누가 싫어진다는 건...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걸 인정하기 싫다는 뜻이거나, 단 한번도 자신에게 문제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았다는 뜻이야."
"..."
"그리구, 난 그런 사람 자기 중심적이라 싫어."
그녀는 그 말을 남기고 묵묵히 저녁 식사를 마치고는 그와 헤어졌습니다. 집으로 갔다는 말이 아니라, 아주 그와 끝내버렸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그의 인생에 찾아온 첫 번째 부정적 시그널이었습니다. 그는 살면서 단 한번도 누구에게 특별히 싫은 소리를 들은 적이 없었습니다. 적어도 그녀와 헤어지기 전 까지는요. 그는 그 신호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 지를 몰랐습니다.
사직서를 품에 품고 몇날 며칠을 고민하던 그는, 결국 회사에 사직서를 내버리고 맙니다. 아무리 고민해도 뭐가 문제인지 전혀 알 수 없었지만, 우선은 더 이상 같이 일하기 싫어진 사람들로부터 도망나오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의 사직서에 대한 회사의 반응은 뜨뜻미지근했습니다. 올게 왔다는 표정들이었죠. 그 순간 그는 알았습니다. 같이 일하기 싫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 자신만이 아니라는 것을.
어쨌건 그는 다시 실업자가 되었고, 실업 급여를 받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실업자로 사는 동안, 그는 맘먹고 다시 일해볼만한 직장을 찾아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쉽지 않았습니다. 가장 걸린 것은 나이였죠. 그가 박사과정을 그만두고 벤처에 뛰어들 때, 나이 30이었습니다. 그 뒤로 거의 6년의 시간이 흐른 것입니다. 나이 36이 되어 그가 해 온 프로젝트들을 뒤돌아보니, 자신이 보기에도 일관성이 없었습니다. 첫 해에는 JSP 프로그래밍, 그 다음 해에는 자바 스크립트 프로그래밍, 그 다음 2년간은 C++/C 서버 프로그래밍, 그리고 그 다음 2년간은 통신 프로토콜 구현. 좋게 봐 주면 다양한 경험을 한 것이지만, 아무리 봐도 그럴듯한 경력이라고 보긴 힘들었습니다. 그가 몸담은 회사들이 한 군데를 빼고 다 망했다는 것도 부담이었습니다. 그런 경력을 가진 프로그래머에게 나이를 따져 많은 연봉을 주어야 한다는 것도 업체 입장에서는 채용을 망설이게 하는 요인이었습니다. 결국, 그는 추천서를 받으러 여기 저기 뛰어다녀야만 했습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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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흥미진진한 이야기에요.
2009/01/20 15:00 [ ADDR : EDIT/ DEL : REPLY ]다음편이 너무 기다려 지네요. :)
아유...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좋은 하루 되세요~
2009/01/20 15:04 [ ADDR : EDIT/ DEL ]재밌네요.. ㅎㅎㅎ 근데, 낭만고양이님. 여기 블로그 RSS주소가 어떻게 되죠??
2009/01/21 10:53 [ ADDR : EDIT/ DEL : REPLY ]안녕하세요? www.buggymind.com/rss 입니다. ^^ 그러고보니 RSS 링크가 표시되는 부분이 제 블로그에는 없네요. 수정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09/01/21 15:02 [ ADDR : EDIT/ DEL ]정말 재미있네요... ^^ 감명깊게 잘 읽었습니다.
2009/01/22 12:37 [ ADDR : EDIT/ DEL : REPLY ]다음편 고대 고대~~~
감사합니다. ^^; 감명씩이나 받아주시다니... ㅜㅜ
2009/01/22 14:14 [ ADDR : EDIT/ DEL ]재밌네요..ㅋㅋ 글 잘 쓰는 사람이 프로그래밍도 잘 한다는데.. 님의 실력도 출중하실듯 하네요.
2009/02/17 18:01 [ ADDR : EDIT/ DEL : REPLY ]늘 건강하세요..
그게 또 그렇지는 않습니다. ^^;
2009/02/18 00:32 [ ADDR : EDIT/ DE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