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oughts2009/01/22 19:04
[이전 글에서 계속...]

그 과정을 겪으며, 그는 조금씩 지쳐갔습니다. 자취방에서 멍 하니 창 밖만 바라보는 시간도 늘어갔습니다. 컴퓨터 앞에서 코드를 매만지는 시간도 점점 줄었습니다. 이러다 화석이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 였습니다.

Last login: Wed Oct 21 16:39:02 2006 from ksnam-desktop
ksnam@ksnam-ubuntu:~$

그러던 2007년의 어느날이었습니다. 모처럼 프로그래밍을 해보려 리눅스에 접속한 그는 그가 마지막으로 로그인한 시간이 2006년의 어느 날에 멎어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는 순간 생각했습니다. '모르는 사이에, 나는 정말 화석이 되어 가고 있구나.' 감상적이 되어버린 그는, 네이트온의 대화명을 이렇게 바꾸었습니다.

[기수] 시일라칸스

그가 알고 있기로, 시일라칸스는 살아있는 어류 가운데 가장 오래된 종이었습니다. 화석이라는 칭호가 어울리지만 아직도 살아 숨쉬고 있는 고대의 생명체. 그는 자신이 그렇게 변해가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순간, 메신저에서 디리링, 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선배였습니다.

[현수] OOPS
    갑자기 왜 대화명은 바꾸고 지랄이야
[기수] 시일라칸스
    ㅋㅋ 그냥요
[현수] OOPS
    아직 직장 못잡았지?
[기수] 시일라칸스
    네
[현수] OOPS
    내일 나랑 알바나 좀 뛰자. A사에 납품한 장비들이 있는데
[현수] OOPS
    몇 대 더 들여가야하거든. 다른 친구들이 좀 바빠서
[현수] OOPS
    손이 좀 필요하다. 괜찮지? 그럼 내일 열시까지 와. 미안

선배는 기수의 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접속을 종료해 버렸습니다. 선배가 그렇게 굴면 급하다는 뜻이었으므로 기수는 두 말 없이 다음날 정각 열시에 그의 사무실로 갔습니다. 둘은 장비를 꾸려 A사로 향했습니다. 벌써 몇 명의 사람들이 빈 책상 앞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두 사람에게 네트워크 포트의 위치와 사설 IP 주소, 반드시 설치되어야 하는 서버 프로세스 몇 가지의 종류를 알려주었습니다.

"sshd를 설치해주시고, 계정을 하나 만들어 주세요. 계정은 우리 회사명으로 해 주시면 됩니다. 패스워드는 일단 아이디랑 똑같이 만들어주시구요."

선배는 지시사항을 꼼꼼히 적었고, 기수는 그대로 시스템을 설치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는 분들은 다 아시겠습니다만, 시스템 설치만큼 시간을 많이 잡아 먹고 지루한 작업도 드물죠. 그는 설치 프로그램이 파일 시스템을 정리하고 시스템 시간을 설정하고 네트워크 인터페이스에 IP를 할당하고 새로운 사용자 계정을 만들고 필요한 패키지들을 옮기는 동안, 그저 멍하니 앉아 있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옆 자리에서 무언가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아까 선배에게 이것 저것 일러주던 사람의 자리였습니다.

"이거 설치는 잘 된 것 같은데요. 이상하게 서버 정보를 못 만들어 내네요. 설치 문서에 따르면 분명히 서버의 위치가 구글 어스 프로그램에 퍽 찍혀야 하는데..."

"kml 파일 크기를 좀 보지."

"파일 크기가 0이에요."

그들의 대화를 듣던 남기수는 호기심을 억누를 수가 없어 슬며시 일어났습니다. 구글 어스라면 예전에 한 번 써 본 적이 있는 프로그램이었거든요. 어차피 패키지들을 설치하려면 오래 걸릴 테니, 잠깐이면 뭐 괜찮겠지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는 슬그머니 그들의 등 뒤로 걸어갔습니다.

"이거 스크립트 확장자가 .py네요."

"파이썬 프로그램인가?"

"네. 이거 아무래도 박팀장님께 물어봐야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어요. 파이썬이라면 예전에 공부 잠깐 하시는 것 같던데..."

"저 죄송합니다만..."

그 때, 불쑥 남기수가 말을 꺼냈습니다.

"네... 혹시 뭐 필요한 것 있으세요?"

시스템 설치 과정에서 무슨 문제라도 생겨 찾아온거라고 생각하는 눈치였습니다. 남기수는 겸연쩍은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대면서 말을 꺼냈습니다.

"저... 괜찮으시면 제가 잠깐 봐도 될까 싶어서요. 제가 파이썬을 잠깐 공부한 적이 있어서..."

그러자 그들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습니다. 남기수는 괜히 주제넘은 짓을 했나 싶어 바로 사과를 하고 자리로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호기심에 그만... 그럼 계속 수고하세요."

"잠깐만요."

그러자 둘 중 나이가 좀 많아 보이는 사람이 그를 불러 세웠습니다. 뿔테 안경에 조금은 차가워 보이는 인상이었지만, 안경 너머의 눈은 환히 웃고 있었습니다.

"도와주시면 저희야 좋죠. 한 번 봐 주시겠어요?"

순간 작년에 있었던 일이 떠오르더군요. 다른 팀 기술자가 우리 팀 문제를 해결해 준다며 찾아온 적이 있었는데, 괜한 자존심에 거절했다가 개피를 본 적이 있었거든요. 또 그러면 안되지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를 불렀습니다. 그의 그때 표정은... 뭐랄까. 이게 웬 떡이냐 하는 표정이었어요.

남기수는 두말않고 자리로 가서 앉았습니다. 사실 그는 파이썬을 몰랐습니다. 이름만 얼핏 들어봤을 뿐이었죠. 그런데도 그가 '파이썬을 안다'고 거짓말을 한 것은... 글쎄요. 아마 코드라면 다 비슷비슷 하겠지 하는 생각 때문이었을 겁니다.

"이게 무슨 프로그램인지... 귀찮지 않으시면 잠깐 설명을 해 주실 수 있나요?"

그러자 뿔테 안경의 남자가 그의 옆으로 바싹 다가 앉더니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그래야겠죠. 우선 서버가 있고, 그 서버가 띄우는 가상 서버들이 있습니다. 가상 서버들을 자식이라고 하고, 원래 서버를 부모 서버라고 해 보죠. 부모 서버는 자식 서버의 위치 정보를 수집하게 되어 있는데, 이 스크립트가 아무래도 그 역할을 해 주는 것 같아요. 그런데 메뉴얼 대로 돌려봐도, 부모 서버의 KML 파일에 가상 서버 위치 정보가 생성이 되질 않는다는게 문제에요."

남기수는 설명을 들으며 프로그램을 뚫어져라 쳐다보았습니다.

"저 그런데... 이 URL들은 뭐죠?"

스크립트 상단에는 두 개의 URL이 있었습니다.

"아... 두 개 중에 하나는 가상 서버가 자신이 돌릴 프로그램을 받아올 때 쓰는 URL이구요. 다른 하나는 잘 모르겠어요. 아직 거기까지 파악된건 아니라서... 그냥 실험삼아 설치를 해 보고 있는 거거든요."

그러자 남기수가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좀 이상한데요. 여기 두 번째 URL이 가리키는 주소는 아무래도 외부 서버인것 같은데... 프로그램 나머지 부분을 아무리 봐도 부모 서버에서 프로그램을 받아오는 코드는 있어도, 부모 서버로 자기 정보를 보내는 코드는 없는 것 같아서요. 이 URL이 부모 서버의 주소로 바뀌어야 하는 건 아닐까요?"

"음.. 그런데 매뉴얼에는 두개 중에 위쪽만 바꾸면 된다고 나와 있거든요."

"뭐, 어쨌든 바꿔서 한번 돌려보죠. 컴파일할 필요도 없으니까 뭐..."

남기수는 vi로 URL을 바꾼 다음에 저장했습니다. 그런 다음에 매뉴얼 대로 프로그램을 다시 실행시켰죠.

네. 그렇게 하니까 프로그램이 돌더군요. 결과도 올바르게 생성되었고요. 어라? 싶었습니다. 상황 판단이 남달라 보였거든요. 그래서 사장님께 요즘 프로그래밍도 하시냐고 물었죠. 아니라더군요. 그래서 '그럼 저 분은 누구냐'고 했더니, 요즘 놀고 있는 프로그래머 후배라고 말씀하시더라구요.
그는 씨익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프로그램 만든 사람한테, 매뉴얼이 틀렸다고 알려줘야 할 것 같네요."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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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병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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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Richpapa

    RSS가 되니 바로 왔습니다. ㅎㅎㅎ 재밌네요. 좀 길~~~게 써주세요.. 갈증나요. ㅎㅎㅎㅎㅎ

    2009/01/22 19:24 [ ADDR : EDIT/ DEL : REPLY ]
    • ㅎㅎㅎㅎ 제가 길~ 게 쓰는 재주가 아직 없어서요 ㅜㅜ 회사에서 길게 쓸 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기도 하고.. 암튼 격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2009/01/22 19:26 [ ADDR : EDIT/ DEL ]
  2. 흥미진진하게 잘 읽고 있습니다 *^^*
    이거 나중에 책 한권 내셔야 할듯 ㅋㅋ

    2009/01/22 22:56 [ ADDR : EDIT/ DEL : REPLY ]
  3. hermian

    헉...이제 설이네요...귀행했다가 오면 좀 많이 올라 올까요 :)
    명절 잘 보내세요. 재미있는 글 감사합니다.

    2009/01/23 08:01 [ ADDR : EDIT/ DEL : REPLY ]
  4. 덧글도 없이...잘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python의 발음이 파이톤인가요? 파이썬이 일반적인것 같아서요.

    2009/01/23 13:28 [ ADDR : EDIT/ DEL : REPLY ]
  5. 비밀댓글입니다

    2009/01/23 14:12 [ ADDR : EDIT/ DEL : REPLY ]
    • 감사합니다. 지적하신 부분이 맞습니다.
      보고 치다보니 오타가... ㅜㅜ

      2009/01/23 15:20 [ ADDR : EDIT/ DEL ]
  6. 두루

    재밌구만요,,,
    설 잘 보내세요...
    아, 그리고 그 남기수에게 안부 좀 전해주시고...^^

    2009/01/23 19:50 [ ADDR : EDIT/ DEL : REPLY ]
  7. 남기수씨 좀 잘 풀렸으면 좋겠습니다. 박선임이랑 언제 만나나요? 기다려집니다.

    2009/01/24 12:50 [ ADDR : EDIT/ DEL : REPLY ]
  8. 안녕하세요? '불확실성과 화해하는 프로젝트 추정과 계획'이란 책을 구매하고 표지를 넘겨 옮긴이 블로그(buggymind.com)를 보고 들어왔다가 제 이름이 있어 깜짝 놀라 들어왔습니다. 지금 막 책 첫 페이지의 옮긴이의 글을 보는 중인데 어찌나 제 지금 상황과 맞아 떨어지는지 깜작 놀라버렸네요. 회사에서 막내이자 이제 사회생활을 내딪고 개발자라는 직업으로 살아가보려 하는 중인데... 불확실성(Uncertainty)이란 것이 정말 너무 답답하고 해결책을 찾아보고 있습니다. 애자일,, 애자일,, 최근에 자주 듣게 된 용어인데, 듣기만했지 아직 알지 못하였는데 이 책을 통해 많이 습득해보려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2009/01/31 15:25 [ ADDR : EDIT/ DEL : REPLY ]
    • 아유 그러셨군요. 제가 번역한 책이 도움이 많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구요. ^^ 건강한 한해 되시기 바랍니다.

      2009/01/31 20:11 [ ADDR : EDIT/ DE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