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일이 있고 열흘 뒤에, 남기수는 선배로부터 전화 한통을 받습니다.
"여보세요?"
- 어. 기수냐? 나다.
"네, 별일 없으시죠?"
- 별일이나 마나 본지 열흘밖에 안됐는데. 그건 그렇고 너 지난번에 시스템 설치하러 가서 혹시 그쪽 사람들한테 야부리친거 있냐?
"야부리요?"
- ... 없나보군. 암튼 이력서 한장 준비해봐. 너같이 나이먹은 프로그래머에게도 관심을 갖는 회사가 있다니...
"네?"
- 저번에 일해주러 갔던 그 회사에서, 너 면접 한번 보고 싶다더라.
선배는 가타부타 설명도 없이 또 전화를 끊었습니다. 잠시 머리를 긁던 남기수는 기계적으로 책상 서랍을 열어 이력서를 꺼냈습니다. 사진까지 깔끔하게 붙인, 완벽하게 준비된 이력서였습니다. 그 이력서를 바라보며, 그는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
"설마, 파이썬 프로그래머를 뽑는 건 아니겠지..."
그리고 그는 선배에게 문자를 보내 언제 누구를 만나면 되는지를 물었습니다. 선배가 보낸 첫 번째 문자에는 '내일 김주임을 만나면 된다. 전화번호는 ...'라고 적혀 있었고, 두 번째 문자에는 '씨팔 졸라 좋겠다'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그날 오후, 남기수는 평소 보다 더 조용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다른 사람 같았으면 김주임이라는 사람에게 전화를 걸어 면접에 대해 시시콜콜 물어보았을 법도 하건만, 남기수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한 일이라고는, 저녁을 먹은 뒤 백팩에 그가 평소 즐겨읽던 프로그래밍 서적을 챙긴 것이 전부였습니다.
다음날. 아침을 일찍 챙겨먹은 남기수는 10시 30분에 A사 김주임을 만났습니다. 알고보니 지지난주 A사를 방문했을 때 만났던 검은색 뿔태의 남자였습니다.
"안녕하세요? 또 뵙네요."
김주임이 먼저 인사를 건넸습니다.
"아 네... 반갑습니다. 어떻게, 그 때 그 프로그램에는 별다른 문제는 없는지..."
남기수의 질문에, 김주임은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네, 도와주신 덕분에 아직까지 문제는 없습니다. 자, 우선 이쪽으로 오시죠."
김주임이 안내한 곳은 자그마한 회의실이었습니다. 테이블 정 중앙에는 녹차백, 커피믹스, 과자들이 잔뜩 쌓인 바구니가 있었고, 회의실 한 켠에는 온수기가 비치되어 있었습니다.
"우선, 차부터 한잔 하시죠. 커피 드시겠어요?"
"네. 감사합니다."
김주임이 차를 타는 동안, 남기수는 품 안에서 이력서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때였습니다. 갑자기 회의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네 명의 남녀가 회의실로 들어왔습니다. 뭔가 재미있는 이야기라도 듣고 온 것인지, 모두들 키들키들 웃고 있었습니다. 남기수는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러자, 그들 중 한 명이 그에게 손을 내밀었습니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저는 박시애라고 합니다."
기습공격이라도 당한 표정으로 멍하게 그 손을 바라보고 있던 남기수는, 황급히 손을 내밀어 악수를 했습니다. 그러자 김주임을 포함한 다섯 명의 명함이 순식간에 그에게 건내졌고, 명함이 없었던 그는 굽신굽신 '죄송합니다 명함이 없어서'를 연발하며 그들 모두와 악수를 나눌 수 밖에 없었습니다.
"괜찮습니다. 자, 앉으시죠."
김주임의 말에, 그는 다시 자리에 앉았습니다.
어느 틈엔가 제 이력서는 박시애라는 분 손에 들려 있더군요. 복사라도 해 올 요량이었는지 그들 중 한 분이 제 이력서를 받아 밖으로 나갔는데, 그 틈에 저는 명함들을 찬찬히 훑어볼 수 있었습니다. 알고보니 박시애라는 분은 팀장이었고, 다른 분들은 같은 팀 소속 팀원들이더군요. 깜짝 놀랐습니다. 왜냐구요? 팀장이라는 분이, 저보다 나이가 어려 보였거든요. 거기다...
잠깐 동안 어색한 침묵이 흘렀습니다. 그 침묵을 깬 것은 박팀장이었습니다.
"저희가 너무 갑작스럽게 오시라구 말씀드려서 놀라셨죠?"
"네 뭐 사실... 조금 놀라긴 했습니다."
남기수가 머리를 긁으며 겸연쩍게 웃자, 박시애의 얼굴에도 미소가 흘렀습니다.
"경력이 참 화려하세요."
"화려하다고 하긴 좀 그렇고... 중구난방입니다."
"박사과정은 왜 중간에 그만두셨어요?"
그의 얼굴에 난감한 기색이 어리자, 박팀장은 황급히 질문을 거두었습니다.
"아, 죄송해요. 쓸데없는 질문을 드렸네요. 저희가 왜 오시라고 했는지부터 말씀드리는 게 예의인데..."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그가 손을 내젓자, 박팀장은 안심했다는 표정으로 다시 말을 이어갔습니다.
"사실 이렇게 모시게 된 것은 김주임 때문이었어요."
그러자 구석에 앉아있던 김주임이 손을 들며 씨익 웃어보였습니다.
"김주임이 뭔가 느낌이 괜찮은 분이 있다면서 한번 만나보자고 하시더라구요. 사실 저희 팀이 생긴지가 얼마 되지 않아서 사람이 좀 부족해요. 특히 이 바닥 경험이 많은 분이 부족하죠. 들으시면 놀라실지 모르겠는데,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중에 아마 남기수씨가 제일 나이가 많으실 거에요. 72년생이시죠?"
"네, 그렇습니다."
"제가 76년 생이거든요."
"아..."
남기수가 나이 같은걸 따지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만, 그 순간 만큼은 좀 놀랐을 겁니다. 그가 상대했던 팀장들 가운데 박팀장이 가장 나이가 어렸으니까요.
"저희 팀에서 앞으로 일년 동안 하게 되어 있는 일은 뭐랄까... SI 성격이 강한 일이에요. 네트워크 관리 시스템을 만드는 일이죠. 김주임 말로는 통신 프로토콜 개발 쪽에 경험이 많은 분이라고 하던데... 맞나요?"
"네, 맞습니다. DIAMETER, RADIUS 등의 통신 프로토콜을 만들어 본 적이 있습니다."
"통신 프로토콜과 네트워크 관리 시스템 사이에 직접적인 관련성이 없을 수도 있지만, 어쨌든 그것도 네트워크 쪽 경험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거든요. 저희 팀원들 중에 네트워크 쪽 경험이 있는 사람이 별로 없어요."
"그럼 말씀하신 프로젝트는 어떻게 하게 된 건지..."
"그게 좀 복잡해요. 저희랑 같이 일을 하시게 되면 자연스럽게 아시게 될테지만..."
그러자 모두들 키득대기 시작했습니다. 남기수는 나중에 그때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저도 경험이 많은 건 아니지만, 그들이 그렇게 웃고 있는 걸 보자니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아, 이 일은 그들이 원해서 시작된 일이 아니구나...' 순간, 쉽지 않을 거라는 예감 같은 것이 들었습니다. A사는 주력 아이템이 따로 있었어요. SI는 부업이 될 수 밖에 없는 회사였죠. 그런데도 SI를 해야 한다는 것은, 주력 아이템 매출이 생각보다 좋지 못해서 다른 일거리를 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그 회사에서 일하는 것이 옳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그때 제 사정은 그다지 좋지 못했어요. 앞뒤 가릴만한 처지가 아니었다는 뜻이죠. 회의실에 들어설 때 이미 '빨리 계약서에 도장찍고 나와야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까...
"죄송해요. 손님 모셔놓고 이러는게 예의가 아닌데..."
박팀장이 웃음기를 채 거두지 못한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남기수도 따라 웃을 뿐, 다른 도리가 없었습니다.
"어쨌든, 경력으로 보자면 저희 팀에서 같이 일하실만한 능력은 충분히 되신다고 생각해요. 지금 따로 하시는 일은 없으시죠?"
"네, 없습니다."
"잘됐네요. 여기 김주임이 저희 팀에서 앞으로 진행할 일과 저희 회사의 비전에 대해서 한 십분 정도 간략히 프리젠테이션 하려고 하는데, 괜찮으시겠죠? 계속 이렇게 제가 중구난방 이야기 드리는 것 보다 그 편이 나을 것 같습니다만..."
그 뒤의 일은 거의 일사천리로 진행되었습니다. 프리젠테이션이 끝나자 회사의 근무 조건, 복지 시스템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고, 계약 조건에 대한 설명도 있었습니다. 그의 말대로 중구난방이긴 하지만 남기수의 경력에는 무시하기 힘든 구석이 있어서, 계약서에 찍히게 될 연봉은 어디 내놓아도 부끄러울만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거기다 결정적으로 A사는 이미 IT 업계에서 일하는 사람 사이에서는 '망하기 힘든 회사', '잠깐은 어렵더라도 결국엔 성공할 회사'로 소문이 나 있었습니다. 거대 포털에 인수 합병될 거라는 소문도 파다했죠. 남기수 입장에선 거부하기 힘든 좋은 조건이었습니다.
그날 바로 계약서에 도장을 찍은 것은 아니었습니다만(그러기엔 남기수에게도 아직 남은 자존심이 있었습니다), A사의 문을 나설 때 그의 마음에는 이미 도장이 콱 찍혀 있었습니다. 결국 이틀간의 형식적인 심사숙고 기간을 거친 뒤, 남기수는 다시 김주임에게 전화를 걸어 '같이 일할 수 있다면 영광이겠습니다'라고 말해버리게 됩니다. 더 버티기에는, 낭인 생활이 너무 고단했던 것이죠.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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