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그래머 09 :: 2009/01/31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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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처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죄의식'에 관계된 부분은 잘 이해가 가질 않았습니다. 어차피 친구들은 그 사고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들이었으니까요. 그런데 나중에 다른 사람들 이야기도 들어보니 조금은 수긍이 가더군요.

그 친구 입학할 당시부터 거의 왕따였습니다. 수석 입학으로 4년 내내 등록금 한푼 안내고 학교를 다닐 수 있었던 것을 시기한 친구들이 많았죠. 사립학교라 등록금이 여간 아니었거든요. 다들 등록금 때문에 아르바이트를 하는데, 그 시간에 그 친구는 전산실에 편히 앉아 숙제를 하고 있었으니... 시기할만도 했습니다. 그래서 그 친구가 전산실에 오면 다른 선수들은 아예 자리를 피하곤 했어요.

물론 우리 동기들이 전부 그렇게 유치하게 굴었던 건 아닙니다. 가정 형편이 좀 넉넉한 선수들은 오히려 동수에게 잘해주었죠. 동수가 공부는 또 좀 잘했습니까. 그러니, 그 친구들 눈에는 오히려 동수가 멋져보였나봐요. 잘생긴건 아니지만 점잖고, 다른 사람이 어떻게 보건 간에 조용히 공부에만 열중하는...

하지만 그래도 동수는 외로웠을 겁니다. 술을 즐기는 성격도 아니라, 학교 이외의 공간에서는 친구들과 교류가 거의 없었어요. 친구들이 많으려면 자기 이야기를 좀 할 줄 알아야 하는데, 그런 쪽으로도 재능이 없었구요.

하지만 사고 이후 허동수의 인간관계는 오히려 잘 풀려 갔습니다. 재활기간이 끝나고 휠체어에 익숙해질 때 쯤 되니 선후배 동기들이 앞다투어 연락을 해서는 일자리를 알아봐주겠노라고 공언을 해대기 시작한 겁니다. 동기 중 하나는 자기 집의 빈 방을 하나 내어주겠다고 호언하기까지 했구요. (부모님들이 고향을 등지고 그의 뒷바라지를 하기 위해 상경하신 덕에, 성사되지는 못했습니다.) 갑자기, 모든 사람들이 그에게 친절해 진 것이죠. 물론, 허동수는 그런 갑작스런 친절이 그다지 오래 지속되지 못하리라는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관심에서 빨리 벗어나려면 얼른 취직을 해야 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쉽지 않았습니다. 일자리를 약속했던 선후배 동기들도 머리를 긁적일 뿐, 그다지 좋은 소식은 들려주지 못했습니다. 덕분에, 그는 재활을 끝내고도 일년 반이 지나서야 첫 직장을 잡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나마, 썩 좋은 직장은 아니었죠.

그런데 대체 왜?

석박사 학위는 없었지만 학부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고, 인턴 경험도 제법 풍부했던 그를 업체들이 외면한 이유는 대체 무엇이었을까요? 저는 최근에야 그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제가 참여했던 프로젝트의 PM(Project Manager)이, 참여업체 주요 개발자들과 가진 간담회 자리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더군요.

이미 사장님들께는 다 말씀 드렸습니다. 프로젝트 일정이 워낙 빡빡하기 때문에, 가급적 야근 가능한 남자 개발자들로 팀원들을 꾸려주십사 하구요. 제가 성차별주의자는 아닙니다만, 이런 상황에 아줌마 개발자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아 보여요.

몸이 불편한 허동수 같은 개발자에게도 '그런 상황'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분들이 아마 많았을 겁니다. 지금도 많을 거구요. 하지만 사람이 죽으라는 법은 없는 모양이에요. 그를 선택한 직장이 결국 나타났으니 말이죠. (나중에 들은 이야긴데 사장이 장애인이셨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아까도 이야기 했었지만, 거기가 그렇게 좋은 직장은 아니었습니다. 일거리가 적은 소규모 웹 개발 업체라 그랬는지 연봉이 보잘것 없었고 (대신 퇴근을 칼같이 할 수 있었다는게 장점이라면 장점이었습니다) 그 다음으로는 근무 환경이 열악했습니다. 사무실이 좁아서 휠체어를 타고 자기 자리로 가려면 난감할 정도였죠. 결국 허동수는 일년만에 직장을 옮깁니다.

그리고 새 직장에서, 그는 꽤 각광받는 웹 프로그래머로 주가를 올리게 됩니다. (연봉도 거의 이전 직장 대비 1000만원 가까이 오르게 되구요.) 그가 했던 일 중 특히 동료들에게 많은 칭찬을 받았던 것은, 단위 테스트를 위한 자바 스크립트 라이브러리와 테스트 프로세스를 구축한 것이었는데요. 그 덕에 개발 결과물의 질이 거의 배는 좋아졌다고 할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물론 학부 시절에 그가 원했던 일이 자바스크립트 프로그래머는 아니었습니다만, 그래도 그는 보람을 느꼈습니다. 사고를 딛고 일어나 인정받는 프로그래머로 다시 태어난 자신이 가끔 자랑스럽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좋은 시절은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그가 입사한지 일년 뒤. 회사는 15억짜리 신규 프로젝트를 수주합니다. 프로젝트를 위탁한 회사는 B 정보통신으로, 원래 모태는 건설사였는데 사업 다변화 차원에서 IT 업계로 뛰어든, 조금은 생뚱맞은 업체였습니다. 프로젝트의 PM을 맡은 사람은 이 회사의 최모 팀장이었는데, 30 초중반의 젊은 남자였습니다. SI 업체에서만 5년을 보낸 경력이 있는 사람이었죠.

프로젝트 관계자들이 모인 첫날, 최 팀장은 개발자들에게 이렇게 선언합니다.

"오늘부터 근태관리 확실하게 하겠습니다. 작은 프로젝트가 아닌 만큼, 모두 그만큼의 책임감을 가져주세요."

근태관리를 확실하게 한다는 말은 '일찍 집에 갈 생각은 버려라'라는 말과 같은 뜻이었는데, 처음에는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많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한달 쯤 지나 PM이 허동수의 직장에 상주하게 되면서, 분위기가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허동수씨. 저랑 잠깐 이야기좀 하실까요?"

어느날, 최 PM이 그를 휴게실로 불렀습니다. 그리고는 물었습니다.

"일은 좀 어떠신가요?"

"아... 아직까지는 특별히 어려운 일은 없습니더. UI 요구사항이 자주 바뀌긴 하는데예. 서버 구조가 바뀌는게 아니고 메시지에도 특별히 손댈 부분이 없어 놔서 아직까지는 괜찮습니더."

"앞으로 더 바빠질 거라는 건 알고 계시죠?"

"예. 그럴 거라꼬 생각은 하고 있습니더."

"그래서 UI 개발자를 한명 충원하기로 했습니다. 다음주부터 출근하게 될 텐데요. 업무 인수 인계를 좀 해 주시기 바랍니다."

"... 예?"

"동수씨 건강 문제도 있고 해서. 힘든 일에서는 빼드리려고 합니다. 대신, 몸이 덜 힘들면서도 허동수씨 역량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쪽으로 배치해 드리려고 합니다."

"..."

"인수 인계 끝나는 대로, 테스트 쪽 업무를 맡아주세요. 테스트 절차 계획서, 테스트 결과서 등의 문서를 만드는 작업도 함께 하셔야 합니다. 아시다시피, 시스템을 납품할 회사들이 품질에 관해서라면 좀 민감해서요. 이 회사에 입사한지는 이제 일년 정도시죠?"

"...네."

"그러면 테스트 쪽 일을 하시더라도 큰 무리는 없겠네요. 지금 동수씨 말고는 테스트 업무를 담당할 사람이 없는 상황이에요. 전무님께 들으니, 자바스크립트를 활용해서 테스트 라이브러리를 만드신 경험도 있으시다구요?"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이 기회에 테스트 쪽으로 역량을 좀 발휘해 주세요."

겉으로는 '역량발휘'였습니다만, PM이 하는 말은 결국 '당신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일거리가 쏟아질 예정이니, 당신 체력으로 감당할 수 있는 쪽으로 가라'는 소리였습니다. 당연히 허동수는 쇼크를 먹습니다. 그간 천직으로 알고 해 온 일이 '프로그래밍'인데, 난데없이 테스트 업무를 보라니요.

허동수 입장에서는 좌천 당하는 거나 진배 없는 상황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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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성안 | 2009/02/03 16:25 | PERMALINK | EDIT/DEL | REPLY

    이 사람들이 어떻게 연결되서 어떤 결과가 나올지 궁금하네요.

    • 낭만고양이 | 2009/02/03 16:36 | PERMALINK | EDIT/DEL

      궁금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설계/구현/개선을 반복하는 중이라 아직 정확하게 말씀드릴 수 없는 점은 양해를...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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