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그래머 10 :: 2009/02/10 23:51



[이전 글에서 계속]

허동수가 진지하게 이직을 고민하기 시작한 것은 아마 그때부터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15억, 옛다 니가 다 해먹어라'가 적힌 사표를 주머니에 넣어가지고 다닐 정도였으니까요. 하지만 우리 시대의 대부분의 직장인들이 그렇듯 그도 그 사표를 쉽게 던지지는 못했습니다. 더 좋은 직장이 그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보장 따위는 없었으니까요. 대신, 그는 테스트라는 새로운 업무에 몰두하기 시작했습니다. 때려칠때는 때려 치우더라도, 일단 맡은 일은 새끈하게 잘 끝내 보자는 생각이었죠. '어디 니들이 나를 빼놓고 얼마나 좋은 시스템을 만드나 보자' 싶은 마음도 있었을 겁니다. 

그가 맨 처음으로 한 일은 CVS 사용자 ID 관리 체계를 뜯어 고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개발팀은 CVS를 '코드를 중앙 집중식으로 관리하는 장소'쯤으로 여기고 있었는데, 허동수는 그것이 적잖이 불만스러웠습니다. CVS 사용자 ID 하나를 여러 팀원들이 공유해서 사용하고 있었던 탓에 누가 간밤에 빌드에 버그를 심어 놓았는지조차 파악하기 힘들 정도였으니, 저라도 그랬겠다 싶긴 합니다. 그는 '나는 네가 간밤에 빌드에 무슨 짓을 했는지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테스터가 되고 싶어 했습니다.

그가 두 번째로 한 일은 CI 서버를 도입하는 일이었습니다. 당시 개발팀원들은 CVS에 미처 테스트가 되지도 않은 설익은 코드들을 널어놓고 퇴근하곤 했는데, 허동수는 그것도 적잖이 불만스러웠습니다. 결국 최종적으로 CVS에서 코드를 내려받아 빌드를 시작할 때, 정체불명의 버그들이 쏟아져 내리는 것을 보아야만 했으니까요. 저라도 열받았을 것 같긴 합니다. 그는 빌드를 매일 매일 '일신우일신'시키고 싶어 했습니다.

그가 세번째로 한 일은 개발자들이 빌드에 심어놓은 클래스들의 테스트 커버리지를 향상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수시로 개발자들이 올린 코드를 내려받아 테스트 되지 않은 클래스들이나 메소드를 테스트하곤 했습니다. 개발자들이 코드를 '집합적으로' 블랙박스 테스트하는 경향이 높다는 사실을 발견할 때 그는 굉장히 당황하곤 했는데, 대개의 경우 가장 큰 문제는 가장 작은 부분의 코드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코드의 테스트 커버리지를 완벽에 가깝게 끌어올리고 싶어했습니다.

그게 네번째로 한 일은 매일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전날 자신이 발견한 문제의 리스트를 들고 개발자들을 찾아다니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슈 트랙킹 시스템(Issue Tracking System)이 줄 수 있는 이득을 그다지 믿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발품을 팔고 개발자들과 대면하는 것이 훨씬 낫다고 믿었습니다. 물론 몸이 불편한 허동수에게는 그다지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한편으로는 이렇게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개발자들도 곧 이해해 줄거야. 내가 불편한 몸을 이끌고 이렇게 돌아다니는 것이 무엇 때문인지...'

하지만 그를 이해해 주는 사람은 소수였습니다. 회사는 그와 연봉을 재계약하지 않았고, 결국 테스트 업무를 시작한 지 삼개월만에 허동수는 짐을 싸야만 했습니다.

허동수씨가 사람을 좀 귀찮게 하긴 했죠. 개발자들 중 몇몇은 그가 문제 리스트를 들고 자리를 찾을 때 마다 노골적으로 싫은 표정을 하기도 했어요. 메일로 보내도 될 것을 왜 찾아오느냐, 뭐 그런 거였죠. 물론 허동수씨는 그럴 때 마다 '직접 설명해야 더 잘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아서...'라고 말했습니다.

특히 최 PM은 그가 그렇게 이 사람 저 사람 찾아다니는 것을 싫어했어요. 바쁜 개발자들을 쓸데없이 귀찮게 한다는 것이 그 이유였죠. (물론 제일 귀찮은 사람은 허동수씨가 아니라 최 PM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허동수씨는 굉장히 열정적인 사람이었습니다. 혼자서 테스트와 관련된 모든 일을 도맡아 했으니까요. 저같으면 그냥 적당히 시간이나 때웠을 것 같기도 합니다만...

나중에 프로젝트가 끝나고 최 PM이 마련한 회식 자리에서 허동수씨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누가 이야기를 먼저 했는지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한번 이야기가 시작되고 나니 그분에 대해 꽤 많은 이야기들이 나왔어요. 근데 희한한 것은, 그 분에 대해서 뭔가 구체적인 이유가 있는 반감을 가진 사람이 별로 없었다는 것이었어요. 오히려 좋게 보고 있었다면 모를까...

결국 그가 회사에서 짤린 건 '누군가 그를 굉장히 귀찮아했다'는 뜻이 되는 거죠. 회식이 끝날때쯤 되니까 술취한 개발자들 몇몇이 그를 찾아가 사과를 하겠다는 둥 어쨌다는 둥 하면서 허동수씨 핸드폰으로 전화를 했는데, 정말로 찾아가 사과를 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자신이 사랑했던 일과 직장이 자신을 엿먹이는 것을 보면서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꽤나 열을 받았을 것 같긴 합니다. 저라도 그랬을테니까요.

그의 주변 사람들이 한결같이 하는 이야기입니다만, 그는 조용하고 내성적이면서도 굉장히 자의식이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자기가 처한 상황을 스스토의 힘으로 통제하려는 욕구도 누구보다 강했죠. 하지만 그 결과는 좋지 못했습니다. 그가 발휘했던 열정과 능력이 그를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길로 인도하고 있었으니까요. 바로, 테스터의 길 말입니다.

직장을 나온 지 육개월 뒤에, 그는 잡링크라는 구직 사이트에서 A사가 내건 신규인력채용 공고를 보게 됩니다.

신규채용공고 - 테스터 약간명 모집

A 사에서 테스트 업무를 담당해주실 테스터를 약간명 모집합니다.

채용 인원은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며, 주된 업무는 개발팀이 내놓은 산출물에 대한 단위/연동/인수 테스트 등에 대한 계획을 작성하고 그에 따라 테스트를 수행하는 것입니다.

연봉은 업계 관행보다 다소 높게 책정될 예정입니다. 채용된 분들은 신규 프로젝트에 바로 투입될 예정이므로, 경험자를 우대합니다. 테스트 분야나 소프트웨어 공학 분야에서 석/박사 학위를 취득하신 분이나, 기타 컴퓨터과학 분야에서 석/박사 학위를 취득하신 분들도 우대합니다만, 저희 A사에서는 특히 실무 경험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관심있는 분들의 많은 지원 부탁드립니다.

문의 : 이선화 (TEL: 02-555-0x37)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그 채용 공고를 보는 순간 허동수는 모종의 '감'을 느꼈다고 합니다.

우짠 일인지는 몰라도, 그 회사에서는 일에 배신당할거 같지는 않았습니더. 채용 공고를 보는 순간, 그런 감이 팍 왔단 말입니더. 그래서 전화를 걸었습니더. 채용 공고만 봐가꼬는 대체 뭘 준비해가지고 시헙을 쳐야 합격할 수 있는지를 당최 알 수가 없었거든예.

그래서 그는 바로 핸드폰을 열고 이선화의 전화번호를 눌렀습니다.

[다음에 계속...]

PS.

이전 포스팅에 격려의 글 남겨주신 분들, 감사드립니다. 일일이 답글을 남기지 못한 점 죄송하구요. 짐작하셨겠습니다만 그럴 형편이 안되어서... ^^; 직접 전화를 주신분도 계신데요. (이 글을 쓰는 와중에 전화를 받았습니다.) 고개숙여 감사드립니다. 그래서 진작에 써둔 글을 그냥 두서없이 편집해서 한번 올려봅니다. 이걸로 감사의 뜻을 대신할 수는 없겠지만, 그냥 그러려니 하고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며칠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여섯개 정도의 키보드를 바꿔서 써봤고(구관이 명관이라고 낡은 삼성 키보드가 제일 낫더군요), 다섯가지 종류의 마우스를 바꿔서 써봤습니다(노트북용으로 나온 작은 마우스가 저한테는 맞더군요). X레이도 찍어보고 침도 맞아보고... 덕분에 이제 일을 할 정도로는 좋아졌습니다. 하지만 당분간은 인터넷 강의나 들으면서 타이핑을 좀 줄이려고 합니다. 제가 풀타임 개발자로 밤새도록 뺑이치는 인생이면 불가능한 일이지만, 제 직장이 그나마 좀 널널한 탓에 몸조심이 가능하다는 건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각설하고, 주기가 종전보다 훨씬 길어지긴 하겠지만, 앞으로도 꾸준히 포스팅 할 수 있도록 해보겠습니다. 뭐 짜다라 대단한 글은 아닙니다만 어쨌든...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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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3m3vilurr의 생각

    Tracked from d3m3vilurr's me2DAY | 2009/02/12 17:35 | DEL

    프로그래머 10화가 나왔네요. 저 말고도 보시는분 있나요? 재밋게 보고 있는데 뭔가 막 가슴아픈 이야기라(..)

  • gsong | 2009/02/12 23:35 | PERMALINK | EDIT/DEL | REPLY

    허동수가 테스터의 길을 가게 될 줄이야. 주인공들이 하나 둘 모이는군요. 나중의 일들도 너무 궁금해집니다. 건필하세요

  • Ryusoo | 2009/02/16 16:28 | PERMALINK | EDIT/DEL | REPLY

    누가 두고간 '불확실성과 화해하는 프로젝트 추정과 계획' 책을 읽다가 이 사이트에 들어와 봤는데요..
    생각지도 못하게 재미있는 글을 읽고 갑니다.
    잠시 둘러보고 가려고 했는데, 다 읽어버렸네요.
    저도 애독자 되겠습니다. 즐겨찾기 추가하고 가요.
    다음글도 기대할께요~

  • dhyi123 | 2009/02/18 11:23 | PERMALINK | EDIT/DEL | REPLY

    전화번호가 555 인걸 보니 미드 좀 보신 듯..
    너무 재밌네요.. 얼른 다음편이 나오면 좋겠는데, 낭고 님 건강때문에..

    좋은 하루 되세요.

    • 낭만고양이 | 2009/02/18 12:56 | PERMALINK | EDIT/DEL

      네 미드 좋아하죠... 콜드케이스랑 CSI를 좋아하는데 티비가 애들이랑 같이 자는 안방에 있어서 요즘은 보질 못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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