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거기서 그쳤다면, 그녀의 행동은 존경하는 선배에 대한 흠모의 행위 정도로 받아들여지고 넘어갔을 겁니다. 그런데 실상은 조금 달랐습니다. 당시 그녀와 같은 팀에 있었던 아가씨의 말을 들어보죠.
이선화씨가 박팀장님을 대하는 태도에는 조금 남다른 구석이 있었어요. 뭐랄까. 따라한다고 해야 하나? (웃음) 네. 따라했죠. 박팀장님이 하는 헤어 스타일도 따라했고, 헤어 밴드도 따라서 샀고, 스타킹 색도 비슷한 걸로 맞추고, 옷도 비슷한 것으로 입고...
우리도 첨엔 몰랐죠. 이상하죠? 이선화씨하고 박팀장님하고 체구가 비슷한데다 머리 길이도 비슷해서, 사실 뒤에서 보면 착각할 때도 있거든요. 박팀장님 쪽이 엉덩이는 더 크신 것 같지만 그것도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수 없는 일이고... (폭소) 그런데 옷까지 비슷하게 입고 나타나면,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아 쟤 왜저러지', 하지 않을 수가 없거든요. 그런데도 몰랐어요.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은 받았는데, 대체 그 이상한 느낌이 어디서 오는지를 알 수가 없었어요. 왜 그럤던 것 같냐구요? 이선화씨가 박팀장님 헤어스타일도 따라하고, 옷도 비슷하게 사서 입긴 헀는데, 그 사이에는 대략 보름에서 한달 정도의 간격이 있었어요. 그러니까 박팀장님 헤어스타일이 바뀌면 보름쯤 있다가 이선화씨 헤어스타일도 바뀌고, 박팀장님 헤어밴드가 바뀌면 한 보름쯤 있다가 이선화씨 헤어밴드도 바뀌고, 뭐 그랬다는 거에요.
그러니, 두 사람을 주의깊게 관찰할 정도로 시간이 많은 사람이 아닌 다음에야, 이선화씨가 그렇게 이상하게 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챌 수가 없었던 거죠.
그래도 두달 지나고 세달 지나니 그 패턴을 눈치챈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어요. 쉬쉬하면서 뒤로 '박팀장님과 이선화 두 사람이 보통 사이가 아닌가보다' 라던가, '이선화 한테 스토킹 전력이 있대' 라던가, '이선화가 레즈비언이라면서?' 같은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나타났죠. 바로 그때쯤, 박팀장님이 자기 팀을 꾸리는 일에 착수했구요. 이선화씨가 그 팀에 지원했을 때, 소문을 들어 알고 있던 사람들은 쇼크를 먹었어요. '이제 본격적인 스토킹이 시작되는 것인가?' 하면서 말이에요.
하지만 결과는 사람들 걱정과는 좀 달랐습니다. 박팀장은 '대체 이 아가씨가 왜 이렇게 열심히 우리 팀에 지원하는 것일까' 하고 조금 의아해하긴 한 모양입니다만 대체적으로는 흔쾌히 이선화를 팀의 일원으로 받아주었습니다. 그리고 이선화는 '따라하기'를 그만두었죠. (아무리 강심장이라고 하더라도, 같은 팀에서까지 그럴 수는 없었을 겁니다.)
박팀장이 인사팀에 특별히 부탁한 덕에 이선화씨는 박팀장 옆으로 냉큼 자리를 옮겨 새 팀을 꾸리는 업무를 보조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마 그때부터 한 보름 정도가 그녀의 회사 경력 중에서 가장 빛나는 나날이었을 겁니다. 뭘 많이 이루어서 그럤다는 게 아니라, 그 당시 그녀를 본 사람이면 한결같이 기억하는 사실입니다만, 얼굴이 '반짝반짝 빛날' 정도로 행복해 보여서 그랬다는 것이죠. (대체 왜 그렇게 행복해 하는 것인지 궁금해 한 사람도 많았습니다만, 아무도 그 답을 찾지는 못했습니다.)
어쨌든 그 보름 동안, 그녀는 사내 채용 공고와 사외 채용 공고를 올리고, 팀원들이 사용할 집기를 배치하고, 자리를 정리 정돈하는 등 박팀장의 손발이 되어 자질구레한 일을 도맡아 했습니다. 특히 열심히 했던 일중 하나는 사외 채용 공고를 보고 연락해오는 사람들과 박팀장 사이의 면담 일정을 잡고, 이메일이나 우편으로 오는 이력서를 한데 정리해서 박팀장이 볼 수 있는 곳에 두는 것이었죠. 박팀장은 그녀 덕분에 면접을 보기가 수월해졌다며, 보름 내내 그녀의 꼼꼼한 일처리를 칭찬했습니다.
그리고 그 보름의 마지막 날. 아래층에서 근무하던 안이태 팀장이 그녀의 자리를 찾아왔습니다.
"이선화씨, 안녕?"
"아, 안녕하세요?"
이선화는 자리에서 일어나 안팀장에게 고개를 숙였습니다.
"박팀장님은 안계신가?"
"네. 조금 전에 IDC로 나가셨는데요."
"IDC?"
안팀장은 대체 팀장이 거기는 왜 가느냐는 표정으로 잠시 이선화를 빤히 쳐다보았습니다. 그녀가 눈을 피해 고개를 돌리자, 안팀장이 다시 물었습니다.
"팀장님 자리가 저기죠?"
"네, 맞습니다."
그녀가 대답하자, 안팀장은 성큼 성큼 걸어 그녀의 자리로 갔습니다. 그리고는 그녀의 책상 위에 놓여 있던 한 남자의 이력서를 집어 들었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
"참 많이도 옮겨 다녔다. 음... 그 중 몇개는 이미 망했구만."
"어느 분 말씀하시는 건가요...?"
"남기수."
"그 분은 거의 채용이 확정된 것 같던데요."
그 말에 안팀장은 헛웃음을 웃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친구 뽑으면 우리 회사도 망하는 거 아닌지 몰라..."
그리고는 왔던 길을 되짚어 돌아가 버렸습니다.
이선화는 어쩐지 기분이 나빴습니다. 그래서 다시 책상에 앉아서도 일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습니다. 잠깐 휴게실을 서성이던 그녀는 포스트 잇을 한장 떼어 박팀장 자리로 가서는 남기수의 이력서 위에 붙였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썼습니다.
- 안이태 팀장님이 방문하셨었구요. 남기수씨 이력서를 보시면서 '이런 사람 뽑으면 우리 회사도 망하는 거 아닌지 몰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자리에 돌아가 앉았습니다. 그녀는 왜 그런 행동을 했던 것일까요? 호사가라면 이런 해석을 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선화는 박팀장을 좋아한다. 그러니 안이태 팀장이 박팀장 자리에 찾아와서 관심있다는 듯 헤집고 다니는 것이, 남성으로서 여성에게 보이는 관심같이 느껴져 기분이 나빴을 수도 있다. 게다가, 이선화 스스로는 남기수라는 사람의 채용에 자기도 기여를 한 부분이 있다고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성과가 폄훼당하는 것은 누구에게라도 기분 나쁜 일이 될 터. 그래서 박팀장에게 남긴 메모에, 나 기분나빠요, 라는 표시를 한 것이다. 물론 유치한 것은 사실이다. 누가 보더라도, 응석 부리는 것 아닌가?'
이런 해석이 옳은지 그른지는 여러분 판단에 맡기겠습니다. 아무튼, 박팀장은 그 메모를 읽고 알듯 모를듯한 미소를 지었다고 하는군요. 물론 그 메모는 바로 쓰레기통으로 들어갔습니다.
[다음에 계속...]
'Thoughts' 카테고리의 다른 글
| 10,000 시간의 법칙 (7) | 2009/03/15 |
|---|---|
| 프로그래머 13 (8) | 2009/03/10 |
| 프로그래머 12 (8) | 2009/02/25 |
| 프로그래머 11 (0) | 2009/02/19 |
| 말랑말랑 키보드 액토 KBD-06 (4) | 2009/02/16 |
| 프로그래머 10 (8) | 2009/02/10 |
TAG 프로그래머
TRACKBACK http://www.buggymind.com/trackback/206
-
ASURADA의 생각 삭제
2009/02/26 11:15TRACKBACK FROM asurada's me2DAY프로그래머 12
댓글을 달아 주세요
재미 있게 읽고 있습니다. ^^*
2009/02/26 11:13 [ ADDR : EDIT/ DEL : REPLY ]감사... ^^
2009/02/26 11:33 [ ADDR : EDIT/ DEL ]오~ 재미있는데요.
2009/02/26 14:10 [ ADDR : EDIT/ DEL : REPLY ]방금 처음부터 다 봤네요.
감사합니다. ^^
2009/02/26 16:27 [ ADDR : EDIT/ DEL ]재미가 있다니 다행이네요...
"이팀장님이 하는 헤어 스타일도 따라했고" 라는 구문이 있는데요.
2009/02/26 18:21 [ ADDR : EDIT/ DEL : REPLY ]박팀장인 것 같습니다.
지적 감사... 고쳤습니다. ^^
2009/02/26 18:31 [ ADDR : EDIT/ DEL ]잘 보고 갑니다.재밌어요~^^*
2009/03/05 00:32 [ ADDR : EDIT/ DEL : REPLY ]감사...^^
2009/03/05 08:54 [ ADDR : EDIT/ DE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