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자질구레한 일이 있긴 했습니다만, 대체적으로 새 팀에서의 이선화는 무난하고 성실했으며 깔끔했습니다. 본인의 외모와도 잘 어울리는, 그런 쪽으로 돌아온 것이죠. 잠시나마 스토커라는 수근거림을 들어야 했던 시절의 이선화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대외적인 수근거림이 잦아들자 이선화의 마음에도 안정이 찾아온 것일까요? 한때 박시애 팀장 덕에 중성적으로 변했었던 옷차림과 머리모양은 다시 여성적으로 바뀌었고, 그녀의 책상 위에는 이런 저런 화분들이 놓이기 시작합니다. 마치 자기 정원에서 바라보던 수선화와의 사랑을 회사에서도 계속 이어가려는 듯 말이죠. 그리고 다시 며칠이 지나, 그녀는 회사 근처 수영장에 회원 등록을 했습니다. 짙은 파란 색의 수영복에, 흰색 수영 모자도 샀죠. 그리고는 수영을 시작했습니다.
매일 퇴근 후 한 시간씩 수영장에 들르는 그녀는 꽤나 열심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박 팀장에게 품었던 마음을 누구도 자세히 아는 이 없듯이, 그녀가 수영장에 다닌다는 사실을 아는 이 또한 회사 안에서는 없었습니다. 그럼 저는 어떻게 알았냐구요?
"이선화씨 아니세요?"
"어... 김주임님?"
네. 수영장 한쪽에서 준비운동을 하고 있던 이선화를 김유식 주임이 발견한 것이었죠. 이선화가 얼마나 민망해했는지는 자세히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어쨌든 그날, 이선화와 김유식은 같은 레인에서 사이좋게 수영을 했습니다. 아니, 정말로 '사이좋게' 수영을 했다고 하긴 좀 어렵겠군요. 김 주임이 자신의 수영 경력(?)을 내세워 이선화의 자유형 포즈에 시시콜콜 간섭을 해대기 시작했거든요. 그날 두 사람이 주고 받은 대화의 골자를 요약해보면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 몸매는 좋은데 거의 물에서는 곰팡이 핀 나무토막 수준이시군요. (김유식)
- 그 똥배에 난 털이나 좀 어떻게 해보시죠? 무지 징그러운데. (이선화)
그렇게 살벌한 대화를 주고 받긴 했습니다만, 두어번 더 수영장에서 마주친 이후로 이선화와 김주임은 꽤 친해졌습니다. 커피도 자주 마시고, 휴게실에서 수다도 여러번 같이 떨었죠. 물론 핑크빛 소문이 날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이선화에게 좀 엉뚱한 구석이 있긴 했습니다만 친한 직원들도 많았고, 그녀는 그들 모두에게 공평하게 다 친절했으니까요.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김주임도 그저 '친한 직원들' 중 하나일 뿐이었습니다.
"이선화씨."
"네?"
"디자인 일을 어떻게 시작하게 된 건가요?"
그러던 어느날이었습니다. 김주임이 이선화의 자리로 찾아와 잠깐 동안 그녀가 하는 양을 물끄러미 굽어보더니,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이선화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 지 몰라 가만히 그의 눈을 쳐다보다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김주임님은요?"
"네?"
"김주임님은 어떻게 프로그래머가 되셨어요?"
대답 대신 질문을 되돌려받은 김주임은 잠시 가만히 있었습니다. 무언가를 생각하는 모습이었죠. 그리고는 말을 이었습니다.
"나는..."
* * *
세상에는 세 가지 부류의 프로그래머가 있습니다. 걸출한 프로그래머, 노력형 프로그래머, 그리고 이도 저도 아닌 프로그래머. 세상의 많은 프로그래머들은 이도 저도 아닌 상태로 태어나 잠시 노력형 프로그래머 시절을 겪다가 걸출한 프로그래머 문턱에서 좌절하고는 평범한 프로그래머로 인생을 마감합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프로그래머들은 자신이 그런 사람들 중 하나라는 사실을 잊고 하루 하루를 보내죠.
김유식 주임은 자신이 정말 그런 사람들 중 하나일까를 항상 궁금해 했습니다. (저는 별로 궁금해하지 않습니다. 궁금해 해봐야 답이 달라지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거든요.) 그리고 언제나 그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했습니다. 어떨 때는 프로그래밍 하는 시간 보다 그런 생각을 하며 보내는 시간이 더 많을 지경이었죠. 그는 엉뚱한 질문을 엉뚱한 순간에 던지는 것으로도 유명했습니다. 가령 회의를 하다가 느닷없이
- 유재석이 프로그래머였더라면 성공했을까?
라고 한다거나, 회식 자리에서 느닷없이
- 이 삼겹살은 자신이 ER 다이어그램으로 모델링 될 수도 있는 존재라는 걸 알았을까?
같은 생뚱맞은 소리를 한다거나 했다는 것이죠.
그런 일이 거듭되자, 사람들은 '엉뚱한 순간에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는 병적 증세'를 '유식이 병'이라는 말로 이름지어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아는게 병'이라는 오래된 속담을 그의 이름에 빗대어 바꾼 것이었죠. 그를 '철학자'라는 별명으로 부르는 사람도 한둘 생겼습니다.
그에게 유식이라는 이름을 지어 준 사람은 어머니였습니다. 아들이 똑똑한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고스란히 담긴, 약간은 별나지만 좋은 이름이었습니다. 어린 시절의 유식군은, 어머니가 그 이름으로 자기를 부를 때 마다 방긋 방긋 웃어주는, 착한 아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유식군은 자신의 이름이 어떤 뜻으로 지어졌는지를 어머니의 입을 통해 듣지 못했습니다. 그가 우리 나이로 세살 되던 해에, 유식군의 어머니는 암으로 세상을 등지고 맙니다. 췌장암이었습니다. 암을 발견하자마자 제때 손썼더라면 목숨을 건질 수도 있었을 지 모릅니다만, 당시 S 그룹 본사에서 청원경찰 일을 보고 있던 아버지 봉급으로 감당하기에 암이라는 병은 너무 값비싼 병이었습니다. 당사자가 치료를 망설이는 동안 암은 폭주하여 신체를 점령해 버렸고, 그 뒤에 찾아올 결론도 결국은 피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머니 없이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아버지의 죄책감 섞인 지극한 사랑 덕에 크게 엇나가지는 않았습니다만, 그의 마음 한켠에는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숨길 수 없는 크기로 자라고 있었습니다. '조금만 더 일찍 손을 썼더라면...' 그는 자신에게서 어머니를 빼앗아 간 것은 50% 정도 아버지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실상은 암을 원망해야 할 것인데, 그는 화살을 아버지에게 돌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때로 싸움을 했습니다. 놀림감이 되기 좋은 이름 덕에, 싸우려고 마음만 먹는다면 사실 건수는 많았습니다. 그는 어머니가 없어 외로운 집에 들어가기 싫을 때 마다 이런 저런 핑계를 대어 크고 작은 싸움을 했습니다. 덕분에 그의 아버지도 이곳 저곳 불려다니며 수없이 허리를 조아려야 했습니다. 그럴 때 마다 그는 못된 생각을 했습니다.
'아직 그 정도 사과로는 충분하지 않아요, 아버지. 앞으로도 아버지는 더 많이 고개를 숙이셔야 할 거에요.'
그가 아버지와 세상에 품은 적의는 때로 그렇게 잔인했습니다만, 그렇다고 더욱 더 극악한 방법으로 자신을 망가뜨리지는 않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아버지의 입을 통해 전해 들은, 유식이라는 이름의 연유를 배반할 자신은 없었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싸움질을 하고 다니면서도 공부를 했습니다. 적당한 대학에 적당한 성적으로 진학하기에는 충분한 성적이었죠.
대입 시험 전날, 그는 아침 일찍 아버지가 근무하는 S 그룹 본사를 찾았습니다. 웬지 아버지께 그간의 싸움질에 대해 사과를 드려야 할 것 같다고 생각해서였죠. 손에는 직접 준비한 도시락이 들려 있었습니다. 물론 아버지를 찾는 그의 마음이 편하기만 했던 것은 아닙니다. 비록 세월이 지나고 아버지가 세상 사람들에게 고개를 숙인 시간이 늘어감에 따라 아버지에 대한 미움이 작아졌다고는 하지만, 그 오래된 적의는 여전히 그 자리에 뿌리깊게 남아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그는 정문을 들어설 때 사실 좀 망설였다고 합니다.
입구를 들어서는 순간, 저는 푸른 제복을 빳빳이 다려입고 사람들에게 아침 인사를 하는 아버지를 보았습니다.
아버지는 양복을 차려입은 직원들이 지나갈 때 마다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입니다! 하고 인사를 하고 계셨습니다. 개중에는 아들 뻘 되는 사람도 있었죠. 나이를 불문하고 인사를 하고 계셨습니다.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입니다!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입니다! 갑자기 궁금해 지더군요. 지금껏 당신께서 견디며 살아오셨을 그 모든 아침들이, 과연 그분 바램대로 좋은 아침이었을지가.
저는 아버지 앞에 가서 섰습니다. 그리고 도시락을 건네드렸죠. 아버지는 놀란 표정이셨습니다.
'유식아...'
이상한 일입니다만, 아버지가 저를 그렇게 다정하게 부르는 건 처음 듣는 듯한, 그런 기분이었습니다. 제가 싸움질을 하도 하고 다녀서 그랬는지 몰라도, 아버지는 말 수가 많이 줄어 계셨어요. 집에서도 저에게 먼저 말을 건다거나 하지 않으셨죠. 제가 먼저 말을 건네면 그제서야 학교 생활은 어떤지, 어디 아픈데는 없는지, 그런 일상적인 질문들을 몇 마디 하곤 하셨는데, 그나마 오래 하는 법이 없으셨죠.
아니, 아버지가 제 이름을 부르시는 걸 정말 오랫만에 듣는다는 그런 기분이었다고 해야 맞을지도 모르겠네요. 어쨌든 기분이 이상했습니다. 아버지와 저는 그렇게 한참을 서로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제가 말했습니다. 소원이 하나 있다구요. 아버지는 '뭔데?' 하고 물으셨습니다. 저는 아버지가 쓰고 계시는 모자를 한 번 써 보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시험을 잘 볼 수 있을 것 같다구요. 아버지는 잠깐 망설이시다가 '내가 지금 근무중인데...' 라고 하시곤 웃으며 모자를 벗어주셨습니다.
저는 그 모자를 써 보았습니다. 아버지의 체취가 머리에서 부터 쏟아지더군요. 아버지의 냄새가 그런 것이었나... 아버지를 안아본지 정말 오래되었구나...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안아 본 것이 내가 몇살때 였더라... 저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정문 쪽으로 빙그르르 돌아 섰죠. 지금 생각해도 왜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어느새 저는 외치고 있었습니다.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입니다!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입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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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11 04:57TRACKBACK FROM emptyframe's me2DAY요즘 가장 즐겨 읽는 인터넷 소설, 프로그래머. 학교 다니면서 천재프로그래머들을 너무 많이 만났고, '이도 저도 아닌 프로그래머'란 사실에 전직할수밖에 없었음. 크흑!
댓글을 달아 주세요
이글의 첫댓글이로군요. 이 소설 재밌게 잘 읽고 있습니다.^^ 언제나 건강하세요.
2009/03/10 20:41 [ ADDR : EDIT/ DEL : REPLY ]지나가는이...ㅋ
감사합니다. ^^
2009/03/10 20:54 [ ADDR : EDIT/ DEL ]아주 재밌게 읽고 있습니다. 다음편이 너무 기대되네요. ㅎㅎ
2009/03/11 04:55 [ ADDR : EDIT/ DEL : REPLY ]감사합니다. ^^
2009/03/11 08:49 [ ADDR : EDIT/ DEL ]비밀댓글입니다
2009/03/13 09:51 [ ADDR : EDIT/ DEL : REPLY ]네 잘 알고 있습니다. 따로 메일 한번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2009/03/13 10:40 [ ADDR : EDIT/ DEL ]감사합니다.
시간들여 읽으려고 미루다 고향가는 기차안에서 봅니다. 유식씨와 아버지 얘기 읽다보니 가슴 한 켠이 뜨끈해집니다.
2009/03/13 21:56 [ ADDR : EDIT/ DEL : REPLY ]그나저나 요 전편 부터 화자가 자기얘기를 한번씩 하던데, 화자도 등장인물로 나오게 되는 건가요? 웬지 그러면 화자는 낭만고양이님 본인이 아니실까하는 생각이 드네요 ㅋㅋ.
헉 ㅎㅎ 정답입니다!
2009/03/13 23:58 [ ADDR : EDIT/ DEL ]라고 말씀드렸으면 좋겠습니다만 아쉽게도 그건 아니라는 ㅎㅎ
나중에 자연스럽게 알게 되실겁니다. ^^
늘 관심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