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oughts2009.03.27 16:37
자주 가는 블로그 중 하나인 http://agile.egloos.com  에 가 보니 말콤 글래드웰이 자신의 저서 '아웃라이어'에서 언급한 10,000시간의 법칙에 대한 글이 몇개 올라와 있더군요.

저는 대체로 10,000시간의 법칙 그 자체에는 동의하는 편입니다. 이전 글에서 박사과정 학생이 5년을 제대로 채우면 그게 9,000시간쯤 될거다 라는 이야기를 했는데, 저는 한편으론 '5년'이라는 시간도 '저절로 정해진 것은 아닐거다'라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http://agile.egloos.com/4834009 에 보면 이런 언급이 나옵니다.

원래 연구에서는 시간 사용을 일, 놀이, 수련으로 나누었을 때 그 중 오로지 수련 시간의 누적만이 실제 퍼포먼스와 관련이 있더라는 발견을 했습니다.

따라서 개발자가 하루에 몇 시간 몰두해 일하냐로 따지지 말고, 하루에 몇 시간 오로지 수련(deliberate practice 특별히 자신의 기량을 높히기 위해 하는 수련 -- 자신이 이미 잘하는 걸 하는 것이 아니라 부족한 부분을 개선하기 위해 고안한 수련을 하는 것)을 위해 시간을 쓰느냐로 따져야 합니다.

이 말을 곧이 곧대로 넋놓고 들으면 '일과 전문성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절망적인 코멘트로 읽힐 가능성이 높은데, (설사 그런 뜻으로 말을 했다손 치더라도) 그렇게 들으면 곤란합니다.

예를 들어 체스 선수 연구에서 밝혀진 것은 이 선수가 토너먼트를 몇 시간 했냐 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그 사람의 실력에 큰 영향이 없었습니다. 대신 자기가 혼자서 기보를 연구하고 연습하고 한 것이 유의미 했습니다.

이 말도 그냥 말 그대로 들으면 '일과 전문성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표현으로 읽힐 가능성이 높은데, 역시 (설사 그런 뜻으로 말했다손 치더라도) 그렇게 읽으면 곤란합니다. 일과 놀이, 수련 사이에는 그렇게 딱 떨어지는 구분이 있는 것이 아니거든요. 왜 그런가요? 체스를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집에와서 기보를 연구하고 연습하는 행동을 안할 리가 없거든요. (취미삼아 바둑을 둘 뿐인 제 아버지도 집에 오면 연구하십니다. ㅋㅋ) 하지만 혹 그런 사람이 있다면, 토너먼트에 나가면 안됩니다. 그리고 체스를 직업으로 삼는 선수가 되어서도 곤란하죠.

물론 인용된 '체스 선수에 관한 연구'와 같은 연구를 하려면 비교 데이터가 있어야 하니까 사람들을 두 부류로 나누어 '토너먼트에 나가 게임만 할 집단'과 '게임하고 와서는 연구도 하는 사람의 집단'을 만들어야 하겠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나눌 수 없다는 거에요. 그리고,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그렇게 하면 누가 나중에 실력이 더 좋아질지는 뻔히 알수 있지 않겠어요? 체스라는 게 이기고 지는 것에 따라 실력을 판가름하는 상대적인 게임인데, 토너먼트만 한 사람의 실력이 다른 사람에 비해 상대적으로 빨리 좋아질 리가 없잖아요. 이런거 알아낼려고 연구했다는 사람도 참...

사람은 일을 하면서 무의식중에 부족한 부분을 개선합니다. 더 잘 하려는 욕구가 있기 때문에 배우고 공부하죠. (이런 욕구가 없는 사람은 논외로 합시다) 그런 개선이 없다면 그건 인간이 아니라 기계에요. (요즘은 기계 조차도 개선하긴 합니다.) 일을 인간답게 하는 사람은 누구나 본능적으로 개선합니다. 더 편하게 하기 위해서, 혹은 더 많이 혹은 더 잘 하기 위해서. 캐스트 어웨이에서처럼 살아남기 위해서 개선하는 경우도 있겠죠. 일이 없다면 개선할 거리도 없으므로, 일과 수련을 분리하는 것은 따라서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 시간을 따로 따지는 것도 아무런 의미가 없구요. (따로 셈할수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자. 그러면 벤처에서 10,000시간을 일한 사람이 '왜 나는 전문가가 되지 못했는지 모르겠다'고 투덜댄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건 그 사람이 '수련을 덜 해서'가 아니에요. '엉뚱한 부분'을 계속 수련하고 개선한 나머지 엉뚱한 부분에서 전문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다못해 타이핑 전문가라도 되었을 겁니다.) 벤처에서 삽질 잘 하는 방법'을 5년동안 익혔다고 세상 사람들이 'SW 개발 전문가'로 불러주진 않아요. 세상사람들이 자신을 '전문가'로 불러주길 바란다면 그에 준하는 지식과 스킬을 갖출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는 '어떤 지식을 갖추어야 하느냐'는 것은 대체 어디서 알아내야 하나요? 그건 그 사람이 속한 커뮤니티로부터 알아내야 합니다. 가령 박사과정 학생들은 연구자 커뮤니티에 속해있고, 그 사람들로부터 계속적으로 피드백을 받죠. 교수, 논문 리뷰어 등등, 많은 사람들로부터 피드백을 받습니다. 무슨 책을 읽어야 하는지, 무슨 과목을 공부해야 하는지, 그런 것들을 그들로부터 배우게 되죠[각주:1].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일하는 분야에 만 시간 이상을 쏟아부었는데도 전문가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은, 자신이 속한 커뮤니티의 목소리를 올바르게 듣지 못해서일 가능성이 큽니다. 저 처럼 수영장에서 제대로 된 지도 한번 받지 않고 혼자 막 수영을 배우는 사람이 10,000 시간을 수영장 락스물에 갖다 푼다고 해서 전문가 소리를 들을 확률이 몇 퍼센트나 되겠어요?

'수련'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도 중요합니다만, '올바른 수련'이 이루어지려면 한 개인이 위치한 사회적 맥락, 좀 더 좁혀서 이야기하자면 그 개인이 전문가가 되고자 하는 특정한 영역을 커버하는 '인적 네트워크'라는 맥락을 고려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수련을 하지만 (연탄을 던지고 받는 일을 하는 사람 조차도) 그 사람을 전문가의 길로 올바르게 인도할 '제대로 된 수련'을 하려면, 아무래도 타인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죠.

교육이 중요한건 그래서입니다.

PS. 비슷한 취지의 글이 있어서 하나 소개... http://kr.blog.yahoo.com/hee6906/614


  1. 커뮤니티 활동을 잘 하면 '전문가'라는 평판이 덤으로 생기기도 합니다. 가령 '아웃라이어' 책에도 나오는 오펜하이머 이야기가 좋은 예인데, 오펜하이머는 지금 기준으로 보면 인적 네트워크 구성의 달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커뮤니티 활동의 달인이라는 식으로 해석할 수도 있죠. '평판'이란 것은 이런 데서 나옵니다. 책에 보면 바로 이 '평판'을 얻는 데 실패하고 인생을 촌구석에서 낭비하는 찌질한 천재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 선수의 잘못은 그가 속했던 커뮤니티의 본질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그 일원으로 활동하는 데 실패했다는 점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그리고 나서는 평생 그 굴레에 갇혀 사는 것이죠. 그러니 '전문가'인지 아닌지 평가받을 기회조차 얻지 못하는 거에요. 몰라서 그렇지 우리 주위에도 이런 선수들 꽤 많을겁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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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병준

소중한 의견, 감사합니다. ^^

  1. 최근에 해당 책을 다 읽고서 관련글을 적어야지 하면서도 미루고 있었네요.
    주말에 정리해서 올려야겠습니다.
    10,000시간이라....
    하루에 10시간씩 300일을 3년간 하면 채울 수도 있는 것이니 그래서 고시를 하는 것인가 봅니다.;;;;

    2009.03.27 18:32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 그걸 어디 음침한 방구석에서 혼자 하게 되면 성공할 가능성이 많이 떨어집니다.

      2009.03.27 20:48 신고 [ ADDR : EDIT/ DEL ]
  2. dhyi123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수련이라는게 일을 하는 도중에도 하게 되는 것인데, 일을 하는 중에 수련이 되지 않는다면 다른 일을 맡아서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2009.03.29 13:34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3. 공감입니다!
    긍정적으로 보면 헛된 시간을 보낸 일들은 없군요. 다만 엉뚱한 곳에서 답을 찾고 있을 뿐..
    미국에선 그래서 mentor - apprentice 시스템을 좋아하나봅니다. 누군가가 길을 보여준다면 시간낭비가 줄겠죠.

    2009.03.31 01:58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4. > 물론 인용된 '체스 선수에 관한 연구'와 같은 연구를 하려면 비교 데이터가 있어야 하니까 사람들을
    > 두 부류로 나누어 '토너먼트에 나가 게임만 할 집단'과 '게임하고 와서는 연구도 하는 사람의 집단'을
    > 만들어야 하겠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나눌 수 없다는 거에요. 그리고,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그렇게
    > 하면 누가 나중에 실력이 더 좋아질지는 뻔히 알수 있지 않겠어요? 체스라는 게 이기고 지는 것에
    > 따라 실력을 판가름하는 상대적인 게임인데, 토너먼트만 한 사람의 실력이 다른 사람에 비해
    > 상대적으로 빨리 좋아질 리가 없잖아요. 이런거 알아낼려고 연구했다는 사람도 참...

    직접 논문을 읽어보지 않으신 것 같네요. Neil Charness 등의 논문을 참고하시면 통상 이런 연구를 어떻게 하는지 아실 수 있을 겁니다.

    '토너먼트에 나가 게임만 할 집단'과 '게임하고 와서는 연구도 하는 사람의 집단'을 나누는 것이 아니고, 일반적인 전문성 연구에서는 예컨대 체스 실력이 뛰어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예를 들면 Elo Rating System 등에 의해)을 나누고 그 사람들의 여러 특징들을 관찰, 측정한 다음 통계적 분석을 통해 어떤 요소가 실력과 큰 관련이 있는지 찾습니다.

    그리고 컴퓨터 프로그래밍 같은 경우는 play, work, practice의 구분이 좀 모호한 면이 있습니다만, 음악이나 운동, 체스 같은 경우는 그 구분이 상당히 뚜렷하고요. 그래서 컴퓨터 프로그래밍 같은 쪽에는 어떻게 일하면서 동시에 수련을 하느냐라는 주제가 흥미로운 연구 대상이지요.

    저 역시 컴퓨터 프로그래밍 일하면서 동시에 수련하는 방법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2009.04.02 11:58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 지적 감사합니다. 말씀하신 논문은 감사히 읽어보겠습니다. 그런데 말씀하신 연구 방법을 취하더라도, 그 통계적인 경향이 '예상했던 것'과 크게 달라지리라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통계적'이라는 것이 보통 어떤 '경향성'을 알아내기 위해 동원되는 수단일 텐데, 보통 주변에서 '전문가'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성향은 대략 엇비슷하거든요. (논문의 중요성을 희석시키기 위해 하는 주장은 아닙니다.)

      그리고 저는 컴퓨터 프로그래밍이나 다른 분야나 '일과 놀이, 연습 사이의 구분이 모호하다'는 점은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과연 무엇 때문에 연습하느냐'하는 점입니다. '전문가'가 되고자 하는 뚜렷한 동기가 있다면, 일과 연습은 그렇게 쉽게 분리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저 역시도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하면서 동시에 수련하는 방법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결론은 비슷하군요 ㅎㅎ

      이렇게 덧글까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

      2009.04.02 13:26 신고 [ ADDR : EDIT/ DEL ]
  5. 조혜근

    안녕하세요 대학교에서 전산을 전공하고 있는 학생입니다.
    동아리 역시 전산동아리에서 활동하고 있는데요,
    저희 전산동아리 홈페이지에 이 10000시간의 법칙의 글을 퍼 가고 싶네요
    도리어 해이해지기 쉬운 학생의 입장에서 꼭 읽어봐야만 할 글이기에
    저만이 아니라 다른 학우들에게도 보여주고 싶습니다.
    허락해 주신다면 감사히 퍼가도록 하겠습니다.

    2009.07.08 11:33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 그냥 링크 거시면 저한테 허락 안받으셔도 되는데.. ㅎㅎ 김창준씨 리플도 읽어보셔야 하니까 가능하면 링크 걸어주세요. ^^

      2009.07.08 17:48 신고 [ ADDR : EDIT/ DE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