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그래머 15 :: 2009/04/28 10:29



[이전 글에서 계속...]

어쨌든 그렇게 해서, 김유식은 벤처 회사에서 자신의 경력을 시작했습니다. 그 시작이 진지하고 창대하였던 것은 아니나, 열심히 일했습니다. 벤처라는 단어가 풍기는 큰 꿈의 냄새와는 달리 개발자로서 큰 돈은 손에 쥘 수 없었습니다만,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인정받는다는 단순한 법칙은 벤처에서도 그대로 통했습니다. 그는 곧 사람들의 인정을 받는 프로그래머가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연구소장이 그를 불렀습니다.

"유식씨."

"네?"

"요즘 일 어때요?"

그는 잠깐 고민에 빠졌습니다. 대체 질문의 의도가 무엇일까, 하고요. 모두가 아침 열시쯤 출근해서 밤 열한시쯤 퇴근하는 생활을 두 달 넘게 하고 있었습니다. '지겹다'는 말은 이제 유행어 수준으로 통용되고 있었고, 한 반 정도의 개발자 입에서는 담배와 커피향이 뒤섞인, 고약한 냄새가 났습니다.

"... 나쁘지 않습니다."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아도 잘 압니다. 모두들 힘들게 일하고 있다는 거요."

"네."

그는 동의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러자 연구소장이 말했습니다.

"그래서, 머리도 식힐 겸 프로그래밍이 아닌 다른 일거리를 하나 드리고자 합니다."

"네?"

그는 뜻밖의 제안을 하고 있었습니다. 유식은 어리둥절해졌습니다.

"다른 벤처에서 웹 프로그래밍 쪽 일감을 하나 의뢰해왔습니다. 이 업체는 아이템은 있는데, 구현할 기술은 전혀 없는 업체에요. 어떻게 이 바닥에 뛰어들게 되었는지 나도 이해는 잘 안갑니다만.... 어쨌든 의뢰가 들어왔고, 도와주기로 의견을 모았습니다. 처음에는 기술적인 조언만 해 주는 것으로 했었는데, 급해서 그런 것인지 가급적이면 우리가 구현까지 맡아주었으면 하고 있습니다. 다른 업체들하고 몇 번 컨택을 하긴 한 모양인데, 다들 시간이 없다고 거절을 했나봐요."

"프로젝트 규모는요?"

"일단 저 쪽에서는 20억을 불렀습니다."

"네?"

20억이라. 20억은 유식이 꿈 속에서나 그려볼 수 있었던, 실체가 없는 돈이었습니다. 한 번도 현실에서 접해 볼 수 있으리라 생각을 못해본 금액이었죠.

"하실 수 있으시죠? 유식씨는 우선 어떤 일인지 알아보고 저에게 보고를 한 다음에, 그쪽이 원하는 추진 일정 대로 일이 진행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합니다. 그리고 적절한 시점이 되면 우리 프로그래머를 구현에 투입할 수 있도록 인력 수급 계획을 짜야 하구요. 몸이 힘든 일은 아닐 거니, 지금보다는 편하게 일을 할 수 있을 겁니다."
 
"..."

어차피 그의 대답이 중요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윗 선에서 유식을 어떤 사람으로 보고 있느냐 하는 것이었죠. 유식은 그 순간, 자신이 중요한 사람이 된 듯한 기분을 느꼈다고 합니다.

스스로를 프로그래머라고 믿어온 사람이, 프로그래밍 아닌 다른 일을 부탁받고는 자긍심을 느꼈다는 겁니다. 첨엔 몰랐는데, 나중에 돌아보니 참 어이없더군요. 지금도 그 때 생각하면 부끄러울 때가 많습니다.

- 왜 부끄러운가요?

내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하고 싶은 건지 몰랐다는 뜻이니까요.

그렇게 해서, 유식은 팔자에도 없는 '컨설턴트'일을 시작했습니다. 자신이 해야하는 일이 '컨설팅'에 해당하는 일이라는 것도 '20억 프로젝트'의 물주들이 자신을 컨설턴트로 부르는 것을 듣고 알 정도로, 그는 초보냄새 풀풀나는 컨설턴트였습니다.

"어때요?"

어느날, 연구소장이 회사로 돌아오는 그를 붙잡고 물었습니다. 20억 회사로 다니기 시작한지 일주일 째 되는 날이었습니다. 20억 회사는, 그의 회사에서 한 블럭 거리에 있었습니다. 그는 그 거리를 걸어서 왕복했습니다. 때는 바야흐로 찌는 듯 더운 여름의 초입이었습니다.

"덥습니다."

그가 그렇게 대답하자 연구소장은 너털웃음을 웃었습니다.

"아니, 그거 말구요. 일이 어떠냐구요."

"그다지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네. 실제로 상황은 그다지 좋지 않았습니다. 20억 규모의 프로젝트라던 말은 거의 공수표에 가까왔습니다. 실질적으로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데 쓰일 수 있는 금액은 20억에서 차츰 줄어 10억, 6억, 그리고 3억까지 줄어 있었습니다. 프로젝트 검수 후에 지급하는 대금도, 일부는 현금으로 지급하되 차액은 Running Royalty 형식으로 할 수 없겠느냐는 말이 회의 석상에서 노골적으로 흘러 나오고 있었습니다. 그는 웹 페이지들 간의 플로우를 점검하는 한편, 비용과 일정을 어떻게 하면 최선으로 조정할 수 있을까도 고민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어차피 예상했던 일이니까요."

"네. 소장님도 그렇고, 이사님도 그렇고 모두들 예상하셨던 일이죠."

유식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하자, 소장은 물었습니다.

"프로젝트를 기간 안에 끝낼 수 있을 것 같기는 한가요?"

"저쪽 디자이너가 웹 페이지의 시안을 보여주었는데, 사업 모델에 계속 무언가가 추가되고 있어서, 시안도 계속 바뀔 것 같습니다. 지금 디자이너가 업무에 있어서 가장 많은 오버헤드를 받고 있는데, 예정대로 시안이 나올지는 불투명합니다. 일정도 사이트 오픈까지 6개월 잡고 있는데, 너무 빡빡하죠. 그런데 무엇보다도 가장 큰 문제는, 우리입니다."

"우리요?"

"네. 우리는 그 정도 규모의 사이트를 성공적으로 론칭할 만큼의 기술력이 없습니다. 웹 서버 프로그래밍을 할 줄 안다고 아무나 포털 사이트 규모의 프로젝트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잖아요? 아무래도 이 SI는 무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받는 돈에 비해, 우리가 아는 것이 너무 없어요."

"유식씨."

소장의 얼굴은 뭔가 재미있는 것을 발견했다는 듯 생글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런 걱정은 접어 두어도 좋아요."

"왜.... 그렇죠?"

"그 사람들이 허둥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만들려고 하는 것이 정확하게 어떤 것인지 몰라요. 사업 모델이 계속해서 변경되고 있다는 것이 그 증거죠. 아마 앞으로도 잘 모를 겁니다. 유식씨한테 컨설팅을 받으면서, 혹시 자기네들 사업 모델에 대한 검증까지 부탁하지 않던가요?"

"네. 그랬습니다."

"그게 바로 잘 모른다는 증거죠. 잘 알고 있었다면, 아마 우리를 하인처럼 부리려고 했을 겁니다. 러닝 로얄티니 뭐니 하는 이야기도 애시당초 꺼내지 않았겠죠. 결국 이 프로젝트는, 끝나는 순간까지 '뭘 만들어야 할 지' 애매모호한 프로젝트가 될 겁니다."

"그렇다면 왜..."

"왜 이 프로젝트를 시작했냐구요?"

"네."

"쉬운 돈이기 때문입니다. 웹 서버 하나를 프로그래밍할 수 있는 정도의 프로그래머는 우리회사에 많습니다. 포털을 론칭하기에는 실력이 좀 딸리는 기술자들이지만 말이죠. 그런데 말이에요. 저런 식으로 요구사항을 바꿔 대면, 웹 서버 하나 이상 만들 수가 없습니다. 결국 그들도 그 사실을 받아들이게 될 거에요. 대규모 사이트를 오픈하려면 그에 맞게 시간을 들이고 투자를 해야 하는데, 고작 6개월에 3억인거죠. 그 기간 동안에는 프로토타입밖에는 만들 수가 없습니다. 그 프로토타입을 고객에게 선 보이게 되는 거죠. 아마, 이 사업은 성공 못할 겁니다."

"그렇다면 왜 저에게 컨설팅을 맡기신 거죠?"

"말씀드렸잖습니까? 쉬라는 의미였다구요. 열심히는 하시되, 무리하지 마세요. 컨설팅 업계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고객이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를 해 주는 것이 컨설턴트가 해야 할 일의 전부이다.' 유식씨도, 그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나 해 주면서, 위안을 해 주세요. 그들이나 우리나, 성공 가능성이 희박한 배를 타고 있다는 면에서는 동지일지도 모르니까요. 기왕이면 기분이라도 좋아야죠."

그리고 소장은 유식의 등을 툭툭 치더니 자기 방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그날 저녁, 유식은 저녁을 먹는 것도 잊은 채 자기 자리에 오도카니 앉아 있었습니다.

[다음 글에 계속...]

PS.

최근에 FIT 번역 작업이 마무리 단계에 있어서 '프로그래머'를 쓰는 데 드는 시간이 줄어들고 있습니다. 혹시나 기다려주시는 분들께는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넓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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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surada | 2009/04/28 16:10 | PERMALINK | EDIT/DEL | REPLY

    오랜 만에 올라오는 글 이군요. 재미있게 읽고 갑니다. ^^*

    • 낭만고양이 | 2009/04/28 23:26 | PERMALINK | EDIT/DEL

      자주 들러주셔서 감사합니다. ^^

  • priss | 2009/04/29 00:31 | PERMALINK | EDIT/DEL | REPLY

    항상 재미있게 읽고 있습니다^^ 손에 무리가 있으신게 안타까울 정도로요..
    이번 화도 잘보고 갑니다. 천천히 연재되어도 좋으니 건강 조심하시구요.

  • 카키 | 2009/04/30 14:02 | PERMALINK | EDIT/DEL | REPLY

    오랜만에 올라 왔군요...^^ 재밌게 보았습니다.
    번역 마무리 잘 하시고 다음 편도 빨리 올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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