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그래머 19 :: 2009/06/29 00:26



[이전 글에서 계속...]

그날 저녁의 회식 자리는 조용했습니다. 술이 좀 들어가자 허동수를 중심으로 약간씩 목소리가 높아지기는 했습니다만, 전체적으로 조용한 자리였습니다. 대화는 거의 질문 형식이었습니다. 모두들 박팀장에게 프로젝트의 성격에 대해서 두세 가지 정도의 질문들을 했고, 박팀장은 아는 대로 성의껏 대답을 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간혹 대답이 막힐 때에는 남기수가 재빨리 끼어들어 구체적인 사항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네트워크 관련 기술에 대한 경험이 있는 사람인지라, 기술적인 사항에 확실히 밝았습니다.

"남기수씨."

"네, 팀장님."

"고마워요."

질문도 잦아들고, 두어 명씩 짝을 지어 개인적인 대화들을 나누는 분위기가 되자, 박팀장이 조용히 술잔을 기울이던 남기수에게 고개를 숙여 감사의 뜻을 표했습니다. 그는 황급히 손을 저었습니다.

"아뇨, 그런 말씀 안하셔도..."

"이번 프로젝트는 남기수씨께서 많이 도와주셔야 할 것 같아요. 저를 포함해서 많은 사람들이 이 쪽에는 경험이 없어요. 이 프로젝트가 어떻게 우리 회사까지 넘어오게 되었는지 저도 자세히는 모르지만, 지금 회사 상황이 조금은 어렵고, 이 프로젝트가 어떻게 끝나느냐에 따라 우리 회사의 사업분야도 조금은 달라질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네에..."

박팀장의 말에 그는 고개를 끄덕거렸습니다. '결국 또 똑같은 일을 하게 되는 건가?" 하는 듯한, 심드렁한 표정이었습니다.

"상황만 보더라도, 남기수씨를 뽑은 건 정말 시의 적절한 일이라고 해야겠죠?"

그 말을 하며 박팀장은 남기수에게 소주잔을 내밀었습니다. 그녀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기쁨이 잔뜩 묻어 있었습니다. 남기수의 얼굴은 이미 술기운으로 붉어져 있었습니다만, 그녀의 미소를 보는 그의 귀밑어름은 거의 진홍색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습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남기수는 그녀가 주는 잔을 받아 단숨에 들이켰습니다. 박팀장도 남기수의 잔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대수씨는 원래 그렇게 말이 없으신 편인가요?"

그 때 갑자기 이선화가 잔뜩 꼬부라진 혀로 나에게 물었습니다. 느닷없는 질문이라 한참을 생각해야 했습니다. 내가 원래 말이 없는 인간이던가?

"네, 그런 것 같습니다. 제가 좀 재미 없는 사람이라서요."

겸연쩍게 웃으면서 머리를 긁적이자, 바로 옆에 앉아 있던 허동수가 내 어깨를 툭 쳤습니다.

"에이, 원래부터 재미 없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꺼. 그런 건 다 택도 없는 소리고예. 자. 한잔 받으이소. 술을 안드시니까 그렇다 아입니꺼. 원래 술을 마시면 안되던 영어도 된다꼬 했습니더. 자. 한잔 하입시더예. 쭉 들이키이소. 쭉."

허동수는 완전히 술에 취해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다른 사람들의 빈 잔 만큼은 꼬박꼬박 챙기고 있었습니다. 그 덕에, 그의 주변에 앉은 모든 사람들은 거의 떡이 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생각했습니다.

'나도 곧 저렇게 되겠군.'

그리고 그 예상은 전혀 빗나가지 않았습니다. 한 삼십분이나 더 흘렀을까? 저는 테이블에 머리를 처박고 눈만 끔뻑거리고 있었습니다. 허동수는 내 등을 두드리며 '괜찮으십니꺼?' 하고 몇 번 묻다가 다시 남은 사람들에게 잔을 돌렸고, 박팀장과 남기수는 계속 프로젝트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으며, 이선화와 김유식은 허동수의 잔을 받으면서 계속 뭔가로 토닥거리고 있었습니다. 나는 생각했습니다. 내가 몇살이더라? 여기가 어디더라? 나는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이더라? 그런 뜬금없는 생각들이 머리속을 맴돌다 픽, 하고 꺼져버릴 때 쯤 나는 정신을 잃었습니다.

눈을 뜨자, 익숙한 숙취의 고통이 사방에서 밀려왔습니다. 어지러웠고, 메스꺼웠고, 두통으로 머리가 저렸습니다. 내가 눈을 뜬 곳은 회사의 휴게실에 마련된 이층 침대 였습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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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늘소 | 2009/06/29 22:12 | PERMALINK | EDIT/DEL | REPLY

    낭만고양이님의 "프로그래머" 흥미있게 읽고 있습니다. ^^ 그런데 갑자기 '나'와 '저'라는 시점이 등장하네요?
    연재 시간이 길어서인지 아니면 시점이 바뀐것인지 모르겠네요? '나'가 누구였는지 궁금해서요 ^^;;
    앞으로도 재미있는 이야기 기대하겠습니다.

    • 낭만고양이 | 2009/06/30 00:29 | PERMALINK | EDIT/DEL

      여기서 '나'와 '저'는 오대수라는 이름의 화자입니다. 1부에서는 소개하지 않았던 사람입니다만, 2부에서 소개했습니다. 너무 띄엄띄엄 올리다보니.. 죄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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