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그래머 22 :: 2009/08/20 15:12
|
|
그 다음주, 우리는 우리가 만들어야 할 코끼리의 모습을 알려줄 사람들과의 첫 모임을 가졌습니다. 프로젝트를 수주한 기술영업팀의 부장님과 과장님 두 분이었습니다. 팀장님 이하 모든 팀원도 모여 한 테이블에 마주 앉았습니다.
부장님이 먼저 말문을 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모든 개발자분들이 참석할 필요가 있나요? 박팀장님하고 저하고 둘만 이야기해도 충분할 것 같은데..."
박팀장이 대답했습니다.
"개발자들 모두 이 프로젝트의 성격이나 해야 할 일에 대해 궁금해 하고 있거든요. 부장님과 과장님 두분이 이 프로젝트 수주 과정을 주도하셨으니, 우리 궁금증을 충분히 풀어주실 수 있을 것 같아서 뵙자고 했습니다."
그러자 부장이 뇌까렸습니다.
"프로젝트 성격이라..."
그리고 잠시 회의실에는 정적이 흘렀습니다. 그동안 박팀장은 노트북을 열고 회의실 스크린에 파워포인트 발표 자료를 띄웠습니다. 우리 모두 본 적이 있는 자료였습니다.
"이 자료는 저희가 프로젝트를 담당하기로 결정되었을 때 전달받은 것인데요."
그때 부장이 손을 들어 말을 막았습니다.
"네. 저희가 드렸으니 저희도 내용은 알고 있습니다. 이 프로젝트가 여러분에게 아주 생소한 프로젝트가 되리라는 것도 예상했습니다. 하지만 이 프로젝트를 맡을 수 밖에 없었던 여러 가지 사정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정은 여러분께 이 자리에서 일일이 말씀드릴 만한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그런 부분에 대한 질문은 하지 않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부장은 회의가 쓸데없이 길어지면 곤란하다는 듯, 딱 잘라 선을 그었습니다. 수긍이 가는 부분이었습니다. "왜"를 묻기 시작하면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 한도 끝도 없이 나오는 일이 많았으니까요. 우리는 "무엇"을 만들어야 하는지를 물어야 했습니다. 박팀장은 웃으며 말을 계속했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런 부분에 대한 질문은 삼가하도록 할께요. 그럼 제가 가장 궁금했던 부분부터 여쭙겠습니다. 아시다시피 이 프로젝트의 영문 약자가 OLYMPUS인데요. 그 첫 두 글자가 Object-Layer입니다. 우리가 만들어야 하는 시스템이 네트워크 관리 시스템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Object-Layer라는 말을 들으면 마치 우리가 만들어야 하는 무엇이 어떤 시스템의 한 계층에 불과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아마 우리 팀원들도 같은 느낌을 받고 있을 것 같은데요. 어떻습니까? 부장님."
부장의 턱에는 미처 깎을 시간이 없었던 듯, 수염이 까칠하게 자라 있었습니다. 부장은 그 까칠함을 음미라도 하듯 어루만지며 천천히 입을 열었습니다.
"팀장님 말씀이 아마 맞을 겁니다."
"'아마'라는 말씀은..."
"이 프로젝트의 명칭만 두고 보면, 분명히 우리가 만들어야 하는 시스템은 어떤 독립적인 시스템이라기 보다는 시스템 플랫폼에 가깝습니다. 아니, 시스템을 만들 때 사용되는 환경에 가까울런지도 모르죠."
그러자 김유식이 나서 물었습니다.
"그럼 그 부분만 개발하면 된다는 말씀이신가요?"
그러자 과장이 나서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시연입니다."
"시연이라뇨?"
"우리가 만든 환경이 관리 시스템 개발에 제대로 사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해 보여야 한다는 뜻이죠."
"그렇다면..."
"네. 환경도 만들고 그 위에서 운용되는 간단한 관리 시스템 정도를 만들어야 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박팀장이 머리를 긁었습니다. 뭔가 심히 난감해졌다는 표정이었습니다.
"그럼 다른 질문을 더 드려보죠. 대체 그 객체 계층이라는 것은 어떤 것이어야 하나요?"
"거기까지는 제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프로젝트를 주신 분들과 미팅을 해서 알아내셔야겠죠. 사실 너무 늦은 감이 있는데... 프로젝트를 주신 분들께서 킥오프 미팅을 하자고 연락을 저희에게 주셨습니다. 미팅 일정은 내일 모레, 그러니까 수요일입니다. 오후 네시부터 일곱시까지 회의를 진행하고, 그런 다음에 회식을 하려고 합니다. 물론 저희도 참석하구요."
회식 생각을 하자 기분이 좋아졌다는 듯, 부장은 너털웃음을 웃었습니다. 그날의 회의는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사소한 질문 서너 가지가 더 오갔습니다만, 더 알아낼 수 있는 것도 없었고,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 보다 더 많은 대답을 들을 수도 없었습니다. 우리는 업무의 범위를 알아내었고, 해야 할 일이 단지 그 범위 안에만 머무르지 않는 다는 것을 깨달은 것 만으로 만족해야 했습니다.
"수요일에 술을 좀 많이 먹어야 할 지도 모르겠군요."
개발실로 향하는 복도를 걸으며 혼잣말인지 질문인지 모를 말을 내뱉자, 옆을 걷던 이선화가 물었습니다.
"왜요?"
"갑과 술자리를 할 때는, 보통 술자리가 길어지게 마련이죠. 앞으로의 일처리를 매끄럽게 한다는 핑계로 그분들께 좀 과한 대접을 해드려야 할 수도 있으니까..."
그러자 그녀는 무슨 뜻인지 알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입을 다물었습니다.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