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oughts2009/09/30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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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주, 우리는 프로젝트를 넘긴 당사자들과 예정대로 모임을 가졌습니다. 기술영업부의 부장과 과장, 그리고 우리팀 전원이 참석한 자리였습니다. 프로젝트를 준 회사는 알고보니 한 거대 기업의 SI 관련 자회사였습니다. 스스로를 프로젝트의 책임자라고 소개한 사람은 그 회사의 선임 연구원으로, 이름은 여운태였습니다.

"안녕하세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그의 머리는 거의 민머리에 가까울 정도로 짧았고, 짙은 갈색 뿔테 안경을 끼고 있었습니다. 짙은 색 눈썹 아래로 빛나는 그의 눈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만만한 상대는 아니겠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차림으로 보면, 도무지 회의를 하러 먼 길을 짚어 찾아온 사람 같지는 않았습니다. 흔한 서류 가방 하나 들고 있지 않았거든요. 회의실에 들어서서 인사말을 건네자 마자 그가 맨 먼저 한 일은 모두에게 명함을 돌리고, 부장과 과장, 그리고 팀장과 인사를 나눈 것이었습니다.

"음... 화이트 보드는 있는데 마커가 없네요?"

그리고는 냅다 화이트 보드 앞으로 가서 서더니 마커를 찾았습니다. 김유식 주임이 바로 밖으로 튀어나가 마커를 가져왔고, 그는 유식에게 꾸벅 고개를 숙여 보이더니 바로 마커의 뚜껑을 열어 보드에 이렇게 휘갈겼습니다.

'OLYMPUS'

그리고는 모두에게 고개를 숙여 보이며 큰 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여운태입니다. 흔한 성이 아니라서 아마 이름 기억하시기는 쉬우실 겁니다. 저는 S회사에서 네트워크 제어 솔루션 관련 개발 일을 맡고 있구요. 어쩌다 보니 이 프로젝트의 책임자 역할을 맡게 되었습니다. 물론 서류상 실제 책임자는 다른 분입니다만, 그 분은 워낙 맡고 계시는 과제가 많으셔서 이 프로젝트에 까지 신경을 쓰실 여력이 거의 없습니다. 해서, 아마 여러분은 앞으로도 저나, 저희 팀의 다른 실무자 분들과만 얼굴을 알고 지내시면 될 것 같습니다. 방금 모든 분들과 인사를 나누기는 했습니다만, 귀찮지 않으시다면 박팀장님께서 팀원 한분 한분씩 무슨 일을 하시는지 소개를 좀 해주시면 안될까요?"

"귀찮긴요. 그럼 제 왼쪽 부터 시작할께요. 이 분은 허동수씨구요, 하시는 일은..."

그렇게 시작된 소개는 대략 십분 가량 이어졌습니다. 그 동안 여 선임은 만면에 미소를 띠고 귀를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소개가 끝나자 그는 함께 온 자신의 동료 팀원들을 소개했습니다. 모두 네트워크 관리 시스템 개발 분야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 바로 OLYMPUS 프로젝트에 대해 이야기를 하도록 하죠. 이 프로젝트는..."

그런데 갑자기 허동수가 끼어들었습니다.

"저 근데 죄송하지만 한가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꺼?"

"음... 네. 말씀하세요."

"실례되는 질문일지는 모르겠는데예. 머리는 왜 그렇게 짧게 깎으신 겁니꺼?"

그러자 여 선임과 그의 동료들이 껄껄 웃었습니다.

"머리에 껌이 붙어서요."

여 선임의 대답을 들은 우리 팀원들도 웃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덕분에 모두들 긴장을 푸는 것 같았습니다.

"자. 그러면 이제 OLYMPUS 프로젝트에 대해서 이야기를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여 선임은 화이트보드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별다른 발표 자료 없이 이렇게 성의없이 회의를 시작하게 된 점은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쓸데없이 긴 발표자료를 만드느라 시간을 허비하는 걸 싫어하는 편이라서요. OLYMPUS 프로젝트의 결과물은 당연히 OLYMPUS라는 이름의 시스템, 또는 네트워크 관리 시스템 개발 플랫폼 형태를 갖게 됩니다. 이 시스템은 네트워크 상에 어느 위치에 들어가게 되는가 하면..."

그가 그려 보여준 도해는 간단했습니다.


"OLYMPUS 시스템, 그러니까 OLYMPUS 플랫폼에 의해 만들어지는 시스템은 기본적으로 네트워크 장치(Network Device)들을 관리하는 시스템입니다. 이런 장치들로는 라우터(router), 스위치(switch) 등등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 시스템은 장치 쪽으로 향하는 South-bound 인터페이스와, 상위 시스템으로 향하는 North-bound 인터페이스를 갖습니다. 그런데 OLYMPUS라는 약어의 OL, 그러니까 Object Layer는 North-bound 인터페이스를 어떻게 구현해야 하느냐 하는 문제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러자 박팀장이 물었습니다.

"어떤 문제죠?"

"통상적으로 네트워크 관리 시스템에서 North-bound 인터페이스라고 하면, 그 상위 시스템과의 연동을 위한 프로토콜 인터페이스를 말하는데요. DIAMETER 프로토콜이나 SNMP, RADIUS 같은 것들이 아마 그 후보가 될 수 있을 겁니다. 임의의 프로토콜을 사용할 수도 있구요. 그런데 OLYMPUS는 독립 시스템이라기 보다는 시스템을 개발하기 위한 플랫폼적인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여기서의 North-bound 인터페이스는 그런 프로토콜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OLYMPUS 위에서 객체지향적으로 프로그래밍을 할 수 있도록 돕는, Object-Oriented API라고 보는 쪽이 적절할 것 같습니다."

그러자 김유식이 손을 들었습니다.

"네, 말씀하세요."

"그럼, 마치 RDBMS(관계형 데이터베이스)에 대한 객체지향적 API를 제공하는 iBatis와 같은 API 레이어를 맨 윗 부분에 얹어두어야 한다는 이야기로 받아들여도 되겠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여 선임의 대답에 모두들 안도하는 표정이었습니다. 어차피 요즘 대부분의 개발이 객체지향적으로 진행되고 있는데, 객체지향적으로 구현되는 시스템에 객체지향 API를 얹는다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로 보이지 않았거든요. 하지만 여 선임이 그 다음으로 풀어놓은 이야기는 조금 달랐습니다.

"그 부분은 뭐 상대적으로 간단해 보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South-bound 인터페이스에 이르면 이야기는 조금 달라집니다. 세상에는 굉장히 많은 네트워크 장비들이 있고, 그 각각은 관리 방법이 서로 다릅니다. SNMP만 있으면 관리 가능한 장비도 있고, CLI까지 동원해야 관리가 가능한 장비도 있습니다. 이런 장비간 격차를 어떻게 해소할 것이냐, 하는 것이 관건입니다."

그러자 남기수가 나섰습니다.

"그 문제는 저희도 이미 예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 지, 지금 연구중이구요."

박팀장은 다소 뜻밖이라는 표정이 되었습니다. 예상이야 했다 치지만, 솔루션을 고안해 내는 업무는 아직 누구에게도 할당된 적이 없었거든요. 물론 남기수가 적임자이리라는 데는 별다른 이견이 없을 것 같았지만 말입니다. 여 선임은 웃으면서 말을 이었습니다.

"연구 중이시라니 다행입니다. 남기수 님이라고 하셨죠?"

"네. 맞습니다."

"예전에 몇 가지 통신 관련 프로토콜을 개발하신 적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그 분 맞으시죠?"

남기수의 얼굴이 순간 붉어졌습니다. 자신의 이름을 기억해 주는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다는 표정이었습니다.

"네, 맞습니다."

"예전에 일하시던 곳 사장님하고 같이 일을 했던 적이 있는데, 가끔 남기수 님 칭찬을 하시더군요."

"부끄럽습니다."

그러자 여 선임은 손을 내저으며 웃었습니다.

"에이... 부끄러우시긴요. 아무튼, 오늘 팀원 여러분들을 직접 뵙고 보니, 많이 안심이 됩니다. 이 쪽에 별다른 경험이 없으시다고 해서 걱정을 좀 했거든요. 그런데 이제는 한숨 돌려도 될 것 같군요."

모두의 표정이 밝아졌습니다. 어떤 의미의 칭찬이건 간에, 칭찬이라는 것은 기분 좋은 것이니까요. 하지만 저는 불안함을 떨쳐 버릴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서로가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그 능력이 한데 모이면 어떤 결과가 빚어질지, 저로서는 도무지 예측할 수 없었습니다. 제가 불안했던 것은 그런 탓이었습니다. 우리는 불확실성으로 가득한 프로젝트에 내던져진, 불확실하기 짝이 없는 개인들이었습니다.

그 뒤로도 회의는 두어시간 남짓 계속되었습니다. 지리할 정도로 많은 질문과 대답들이 이어졌고, 회의가 끝날 때 쯤에는 모두들 지쳐 있었습니다. 허동수는 간혹 꾸벅 꾸벅 졸기도 했습니다. 이선화는 노트에 이상한 기호며 그림들을 잔뜩 휘갈겨 대고 있었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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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병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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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ushop

    22편 이후 오랫만이네요..항상 재미나게 보고있습니다..감사합니다.^^*

    2009/10/02 00:39 [ ADDR : EDIT/ DEL : REPLY ]
  2. ㅎㅎ 이번에도 역시 재미있게 보았습니다 ^^

    추석은 잘 보내셨나 모르겠네요 ^^

    2009/10/04 13:38 [ ADDR : EDIT/ DEL : REPLY ]
  3. rok

    너무 재미있게 보고 있습니다.
    좀 더 자주 올려주시면 좋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
    다음편도 너무 기다려지네요 ㅎㅎ

    2009/10/05 14:32 [ ADDR : EDIT/ DEL : REPLY ]
  4. dhyi123

    제가 하는 프로젝트와 OLYMPUS가 비슷하네요.. 저희는 장비와의 south bound로 SNMP를 쓰고 있습니다.
    아는게 나오니 더 재밌네요..

    2009/10/08 17:06 [ ADDR : EDIT/ DEL : REPLY ]
  5. sunny

    와~오랜만에 혹시나해서 들렀는데 업데이트되어있네요~!
    재미있어요!!ㅋㅋ 쓴다구 수고가 많으시네요!!!!! 다음편 기대합니당ㅋㅋㅋ

    2009/10/08 20:53 [ ADDR : EDIT/ DEL : REPLY ]
  6. 볼때마다 재밌게 읽고 있습니다.
    나중에 책으로 나오면 꼭 사서 보겠습니다. ^^

    2009/10/13 08:24 [ ADDR : EDIT/ DEL : REPL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