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그래머 24 :: 2009/11/03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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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저녁, 예정된 회식이 열렸습니다. 여 선임은 목소리가 꽤 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스스럼 없이 우리 팀원들과 어울렸고, 격식에 구애받지 않고 잔을 돌리고 담배를 피웠습니다. 술이 몇 순배 돌자, 그는 잔을 내려놓고 나에게 말을 건냈습니다.

"사실 저는 예전에는 용역 관리를 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럼 주로 어떤 일을 하셨나요?"

내 질문에 그는 잠깐 멍하니 허공을 쳐다보다가 대답했습니다.

"주로 개발을 했습니다."

"연구소 특성상 직접 개발을 하실 일은 없을 것 같은데..."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논문을 훑어보고, 솔루션들을 비교해 보고, 대안을 찾는 일이 주된 업무가 되어야 했습니다만, 인력이 부족했죠. 그런 상황에서는 누군가 나서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을 떠 맡아야 하죠. 아시겠습니다만, 저희 회사에는 개발에 전문적인 경험을 갖춘 사람이 드뭅니다. 그러니, 남들보다 조금만 더 경험이 있으면 전문가로 행세할 수 있죠."

"네에..."

내가 고개를 끄덕거리자 그는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고 말았다는 표정으로 잔을 내밀었습니다.

"어쨌든,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이번에 잘 해주셔야, 저도 회사에 낯이 서니까요."

"별말씀을... 저희 팀장님을 비롯해서 다른 분들이 능력이 출중하시니까,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팀장님께서 평판이 좋으시더군요. 저도 몇몇 분을 통해 전해 들었습니다. 해서 크게 걱정은 하지 않습니다. 다만 앞으로 제가 이런 저런 요구사항들을 들고 자주 귀찮게 해 드릴지 모르는데, 용역을 하시다 보면 자주 생기는 일이니 저를 너무 미워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그가 껄껄 웃자 옆에 앉아 있던 박팀장이 웃으며 끼어들었습니다.

"너무 자주 바꾸시지만 않으면 괜찮아요."

요구사항이 바뀌는 것은 당연하다는 표정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요구사항이 너무 자주 바뀌면 갑과 을의 관계는 이내 서먹해지고 말죠. 개발자는 짜증을 내고, 용역 담당자는 '어쩔 수 없다'는 말을 반복하게 되고, 개발 팀장은 지쳐버리구요. 이 바닥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요구사항으로부터 프로그램을 만들어 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요구사항에 질려 있었습니다. 프로젝트 마감시한이 가까와 오는데도 일이 전혀 줄어들지 않는 것은, 바로 그것 때문이었으니까요.

술기운 탓이었는지, 요구사항에서 시작된 저의 상념은 어느새 올림푸스라는 이름을 가진 신들의 신전에 가 닿아 있었습니다. 세상 모든 것들의 창조주이면서도 그 모든 것으로부터 비롯된 갈등에서 전혀 자유롭지 못했던 그리스 시대의 신들의 모습은, 모든 것을 만들어 내야 하면서도 그 과정을 온전히 즐길 수 만은 없는 개발자들의 신세와 닮아 있었습니다. 그러니, OLYMPUS라는 프로젝트 이름이 어쩐지 의미심장하게 느껴진 것은 당연하다고 해야 할까요.

앉은 바닥이 너무 뜨거웠던 탓인지, 낯이 금새 벌겋게 달아 올랐습니다. 찬 바람이라도 쐬면 나아질까 싶어 김유식과 담배를 피우러 음식점 밖으로 나섰지만, 한번 달아오른 얼굴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고 머리 속은 그리스 신화의 주인공들이 벌이는 분탕질로 어지러웠습니다. 문득 헤라클레스 생각이 났습니다. 에우리스테우스가 던진 열두가지 업을 무슨 어린애 장난 마냥 간단하게 해치우고서도 비극적인 죽음을 맞아, 영웅이 아닌 신으로서 인생을 마감한 헤라클레스 말입니다.

솔직히 말해, 그의 그런 능력이 부러웠습니다. 뒷일이야 어찌 풀리건 간에, 당장 닥친 일을 키보드질 몇 번 만으로 해치울 수 있는 헤라클레스적인 능력이 나의 손끝에 강림하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객적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죠. 알콜 뿐 아니라 몽상에도 취해 있던 나를 깨운 것은 김유식이었습니다.

"담배 피우다가 자는 사람은 첨 보겠네. 정말 자요?"

"아니. 서서 자는 사람 봤어요?"

"글쎄. 지금 보고 있는 것 같은데."

"허 참 사람 싱겁기는..."

"그나 저나. 박팀장님 안보이시네. 술취해서 화장실이라도 가신 건가?"

창으로 안을 들여다 보니 정말 박팀장이 없었습니다. 여 선임은 이 사람 저 사람 술을 부어주느라 정신이 없었고, 허동수는 평소와는 달리 일찍 취했는지 테이블에 코를 박고 엎어져 있었습니다. 이선화는 턱을 괴고 뭔가 생각에 빠져있는 표정이었고요. 남기수만 홀로 멀쩡했습니다.

"글쎄... 어딜 가셨나. 먼저 들어가요. 나는 한대 더 피우고 들어갈께."

"그래요 그럼. 그나저나 여 선임이라는 분. 대단하네. 혼자서 소주 세 병은 넘어 마신 것 같은데 취한 것 같지 않으니... 그럼 정신 좀 차리고 들어와요."

나는 잠깐 주변을 걷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걷다 보면 정신이 좀 맑아지지 않을까 싶어서였죠. 그런데 모퉁이를 막 돌아서니, 어디선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당신 정말 이럴 거야?"

박팀장이었습니다. 평소 때의 온화한 어조와는 달리, 그녀의 목소리에는 잔뜩 날이 서 있었습니다.

"내가 뭘 어쩄는데?"

뒤이어 들려온 것은 안이태 팀장의 목소리였습니다. 안 팀장이 대체 여기는 왜?

"왜 내 뒤를 이렇게 졸졸 따라 다니면서 귀찮게 하냐구!"

"몰라서 물어?"

"그래 모르겠다. 대체 왜 그러는데?"

반사적으로, 나는 몸을 웅크려 어둠 속으로 피했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 오고가는 대화는 내가 회사에서 알고 있던 박팀장과 안팀장의 대화가 아니었습니다. 숨죽여 들어야만 하는 사생활의 냄새가 짙게 배어 있는, 그런 말다툼이었습니다. 타인의 인생에 쓸데없는 관심을 갖고 사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만, 나는 어느새 '이건 전부 술 탓이야'라는 말을 뇌까리며 귀를 쫑긋 세우고 그들의 이야기를 엿듣고 있었습니다.

"당신, 아직도 내가 당신 여자인 줄 착각하는 거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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