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그래머 25 :: 2009/11/05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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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자기 여자인 줄 아느냐니? 그들이 나누는 내용은 내가 들어 알고 있는 사실과 달랐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짧은 시간에 어느새 결론을 내리고 있었습니다. 안팀장이 박팀장을 못살게 군 것, 프로젝트가 제대로 굴러가지 못하게 괴롭힌 것, 그리고 주차장에서 뺨을 맞은 것 등등은 단순한 시기심의 결과가 아니었습니다.
"물론 내 여자는 아니지."
"그런데 왜 이렇게 쫓아 다니면서 괴롭히는 건데?"
갑자기 안팀장의 목소리가 뚝 끊겼습니다. 주변에서 흘러나오는 취객들의 목소리를 빼면, 사방은 그야말로 괴괴한 적막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순간, 그 자리에 더 있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발걸음을 돌려 다시 식당으로 향했습니다. 술이 확 깨는 것 같았습니다.
"어딜 갔다 와요?"
식당 밖에는, 남기수가 서 있었습니다. 그도 정신을 가다듬으려는 듯, 커피를 마시며 담배를 피우고 있었습니다.
"기수씨도 담배 피워요?"
내가 묻자 그는 멋적게 웃었습니다.
"끊었었는데 가끔 이렇게 술 마시면 피우죠. 그런데 어디 다녀 오세요?"
"아 그게..."
그 때 누군가 걸어오는 기척이 느껴졌습니다. 박팀장이었습니다. 남기수가 반색을 하며 말을 건넸습니다.
"팀장님. 어디 다녀 오세요?"
"아... 배가 좀 아파서요."
"여자 화장실은 저쪽이던데..."
그의 말에 박팀장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어렸습니다. 하지만 이내 밝게 웃으며 말하더군요.
"술들은 많이 마셨어요? 기수씨도 많이 취한 것 같네?"
"아뇨... 뭐 그냥 조금... 여선임님이 술이 굉장히 쎄시네요. 같이 오신 분들은 별로 드시지 않는 것 같은데. 조금 있으면 2차 가자고 하실 것 같아요."
"2차라..."
순간 박팀장의 얼굴에 씁쓰레한 미소가 번졌습니다. 술자리가 길어지는 건 영 마뜩찮다는 표정이었습니다.
"자. 들어가죠. 손님을 모셔놓고 이렇게 너무 오래 밖에 있는 건 예의가 아니잖아요?"
박팀장의 말에 우리는 다시 식당으로 들어갔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여 선임이 웃으며 말을 건넸습니다.
"다들 오셨네요? 지금 2차를 어디 갈까 이야기하던 중이었어요."
"어딜 가고 싶으신데요?"
박팀장이 묻자 여 선임이 대답했습니다.
"뭐... 가까운 노래방이나 갈까요?"
그러자 테이블에 코를 박고 있던 허동수가 고개를 살며시 들더니 물었습니다.
"어디 좋은 데 말씀이십니꺼?"
그러자 여 선임은 허동수를 물끄러미 쳐다 보더니,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이 분 좀 취하셨네. 노래방 가서 술 좀 깨고 들어가자는 말이었어요. 괜찮으시죠?"
그러자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며 술잔을 돌리던 그의 동료들이 말했습니다.
"여선임 노래방 까지 갈려구? 우리는 먼저 일어나야 할 것 같은데... 애기들이 기다려서 말이야."
그러자 여 선임이 웃으며 말했습니다.
"그럼 나머지는 제가 책임질께요. 두 분은 먼저 들어가시구요."
그리고 우리는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회식비는 여 선임이 어느새 치른 상태였습니다. 영업부장이 당황해 왜 그러셨냐고 여 선임을 가볍게 나무랐지만, 그는 당연한 것 아니냐고 말하고는 자켓을 걸치고 식당을 나섰습니다. 부장이나, 팀장이나 모두 조금 의외라는 표정들이었습니다.
하지만 허동수는 2차에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노래방들이 전부 지하에 있었던 데다, 그의 휠체어가 내려가기에는 너무 가팔랐던 탓이죠. 그는 이 말을 남기고는 쓸쓸히 사라졌습니다.
"그럴 줄 알았다니깐..."
그러자 여 선임이 말했습니다.
"아이구... 2차 장소를 잘 못 골랐군요."
"아뇨. 어차피 허동수씨 많이 취하셨는 걸요."
내가 그렇게 말하자 여 선임은 그래도 미안한데... 하며 뒤통수를 긁적거렸습니다. 어쩐지, 그와 함께 하는 프로젝트는 이전과는 조금 다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날의 노래방은 그야말로 광란의 도가니였습니다. 모두 마이크를 놓지 않으려 했고, 노래만 흘러 나오면 몸을 흔들어 댔으니까요. 선화가 노래를 하면 유식이 랩을 했고, 남기수가 흐드러진 발라드로 분위기를 깰라 치면 여선임이 나서서 뽕짝으로 수습했습니다. 영업부장과 과장도 나온 배를 흔들어 가며 보조를 맞추었구요. 노래를 못하는 저는 그냥 탬버린이나 칠 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지만, 그래도 즐거운 자리였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단 한 사람, 모두가 노래방을 나설 때 까지 단 한 곡의 노래도 부르지 않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박팀장이었죠. 그녀는 두시간 동안 내내 웃으며 박수로 장단을 맞추었지만, 한 번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선화가 그녀를 일으켜 세우려고 나섰지만, 그녀는 일어서지 않았습니다. 그저 컨디션이 조금 좋지 않다며 미소를 지을 뿐이었죠. 남기수는 그런 그녀를 가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습니다.
[다음 글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