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oughts2010/03/22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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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식이 내 어깨를 툭 치며, 말했습니다.

"오대리님 블로그에 재미있는 거 적어놨던데, 그러니까 요지가 프로그래머는 예언자쯤 된다 머 그런건가요?"

네이트온 대화명 옆에 블로그 주소를 적어놨더니 들러본 모양이었습니다.

"뭐... 굳이 예언자라고 부를 것 까지는 없는데 프로그래머 없이는 컴퓨터 사용에 필요한 소프트웨어를 구할 수 없을테니까 일반 사용자 입장에서는 그렇게 받아들일 수도 있지 않겠나 싶어서 말이죠."

그러자 유식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했습니다.

"그런데 예언자는 보통 소수잖아요? 프로그래머는 그렇게 받아들이기엔 너무 많아 놔서..."

키들거리는 그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정말 그렇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프로그래머는 이제 너무 많아서 선지자연 하기에는 희소성이 너무 떨어지는 존재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 프로그래머가 이렇게 많아졌죠? 우리 자랄 때만 해도 프로그래머가 뭐 하는 인간들인지 아는 사람이 드물었는데, 요즘은 초등학생한테 물어도 '아, 게임 만드는 사람들요?' 라고 대충은 대답할 정도니, 진짜 많아지긴 했어요 그죠?"

"많긴 많죠..."

그러자 박팀장이 지나가면서 한 마디 했습니다.

"뭐가 많아요? 어딜 가나 사람 없다고 투덜거리고들 있는데."

그러자 유식이 중얼거렸습니다.

"그러니까 '그정도'로 많은 건 아니라는 거구나..."

"네?"

"아, 아닙니다. 그런데 팀장님. 오늘 업체 분들하고 회의 한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저번에 도출한 요구사항에 대해서 논의하신다고..."

"네. 맞아요. 그런데 전부 오실 필요는 없고. 저하고 남기수씨 두 사람만 들어가도 될 것 같아요. 다른 분들은 신경쓰지 말고 하던 일 하세요."

유식은 자리로 돌아갔고, 곧 개발실에 정적이 찾아왔습니다. 모두들 파티션에 파묻혀 쥐죽은 듯 지냈죠. 그 고요함이 깨진 것은 오후 세시쯤이었습니다. 박팀장이 종종걸음으로 개발실에 들어오더니, 모두를 호출하더군요.

"지금 즉시 회의실로 모이세요."

웃는 낯인걸 보니 나쁜 소식은 아닌 듯 싶었습니다. 선화가 물었습니다.

"무슨 일이세요?"

"아... 여선임이 우리가 제출했던 요구사항을 보고 수정안을 냈어요. 그런데 별 차이가 없어서, 그냥 개발 진행해도 무리는 없을 것 같거든요. 우선 수정안 검토를 하고, 개발 일정을 잡아야 할 것 같아서 모두 오시라고 했습니다."

정말 그랬습니다. 프로젝터가 보여주는 요구사항 목록은 우리가 제출했던 것 과 신기할 정도로 닮아 있더군요. 모두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그런데 남기수만은 마땅치 않아 하는 표정이었습니다.

"뭐 걸리는 거라도 있으신가요 기수씨?"

팀장이 묻자 남기수는 이런 말을 해도 되나, 하는 표정으로 어렵게 입을 열었습니다.

"사실 회의실에서는 모든게 너무 자연스럽게 풀려서 그냥 네네 알겠습니다 하고 말았는데요. 아무래도 여선임 쪽에서도 정확한 고객 요구사항을 모르는 것 같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글쎄요. 우리가 생각한 시스템 사용 시나리오는 사실 평범합니다. 개발자로 일해 본 사람이면 누구나 생각해 낼 수 있는, 딱 그정도의 수준이죠. 그런데 실제로 일을 해 보면 그런 평범한 시나리오가 그대로 먹혀 들어가는 일은 잘 없거든요. 뭔가 예외상황이 생겨도 생기게 마련이니까요. 만일 여선임이 생각한 고객 요구사항이 정말로 이 시스템의 실제 사용자, 그러니까 개발자들로부터 나왔다면, 이렇게 단순할 리는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여 선임도 결국 고객 요구사항을 '추정'했고, 그 추정의 결과물을 가지고 우리가 낸 안을 확정한 것이 아니냐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는 것이죠."

"추정 결과로 추정 결과를 컨펌했다, 뭐 이런 뜻입니꺼?"

허동수가 묻자 남기수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네, 뭐 그런 의심이 듭니다."

그러자 팀장이 물었습니다.

"그럴 경우 나중에 우리는 어떤 손해를 보게 될까요?"

모두들 가만히 있었습니다. '뻔한걸 왜 묻고 그러세요'하는 표정들이었습니다.

"시스템을 납품할 때 쯤 요구사항이 바뀌게 되겠죠."

내 말에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러자 다시 박팀장이 물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좋을 것 같으세요?"

모두들 조용히 입을 닫고 있었습니다. 사실 저는 박팀장의 입에서 뭔가 고수다운 의견이 나오지 않을까 기대했습니다만, 박팀장은 그저 질문하고 답을 기다릴 뿐이었어요. 하지만 아무도 대답을 하지 않자, 결국 박팀장이 입을 열었습니다.

"그럼 일단 이 요구사항 대로 가기로 합시다. 여 선임과 협의해서 이 요구사항이 정말로 고객의 요구사항인지 확인하는 작업은 저와 남기수씨가 하기로 하겠습니다. 오대리와 김유식 주임은 이 요구사항들을 분석해서, 아무리 고객이 변덕스러워도 반드시 만족시켜야 하는 것들이 무엇인지 추려 주세요. 그런 다음에 구현 일정을 다시 논의하기로 합시다."

유식은 '아 드디어 똥무더기가 떨어지는구나' 하는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그 뒤를 선화가 종종걸음으로 따라갔습니다. 문득 '쟤네들 사귀는 거 아냐?'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대리님도 저랑 비슷한 생각 하십니꺼?"

"네?"

허동수가 뜬금없이 물었습니다. 그는 나를 쳐다보며 빙글빙글 웃고 있었습니다.

"저 친구들 사귀는 거 아닐까예?"

"글쎄요..."

"잘 어울리기는 하구마는..."

"잘 어울리긴 하는데, 그런데요?"

내가 되묻자 허동수가 씨익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뭐, 그렇다꼬예."

허동수는 휠체어를 밀어 자기 자리로 돌아갔습니다. 전혀 수줍음을 타지 않는 성격인데, 그날따라 허동수의 미소에는 알 수 없는 부끄러움이 배어 있었습니다. 나는 생각했습니다.

'건강 생각해서 술만 좀 줄이면 참 좋을텐데...'

노트를 챙겨 자리로 돌아오자, 유식이 내 의자에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주인도 없는 자리에서 뭐하심?"

"뭐하긴요. 오대리님 기다리지. 하달된 지령을 받들어야 할 것 아닙니까?"

"그렇긴 해... 잠깐 이야기좀 할까요?"

"한참 이야기하셔도 됩니다."

우리는 커피를 한 잔씩 타 가지고 소회의실로 갔습니다. 큼지막한 원형 테이블과 다섯개의 의자가 회의실에 놓인 집기의 전부였습니다. 그가 자리에 앉더니 대뜸 말했습니다.

"커피를 좀 줄어야 할텐데... 밤에 잠이 잘 오지 않아요."

"그래요? 언제부터?"

"글쎄요... 한 보름쯤 되었나. 예전엔 베게에 머리를 누이자 마자 잠들었는데 요즘은 그게 잘 안되네요."

"다른 걱정 있는 건 아니고?"

"그런건 아니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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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병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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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로그래머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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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프로젝트에서 중요한 부분 중 하나가 요구분석인 것은 분명하군요. ㅠㅅ-)

    고객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바를 정확하게 알고 있는 경우가 거의 없으니...
    만들어진 제품을 보고서야 요구사항을 추가하거나 수정하는 경우가 많겠죠?

    아직은... ㅡ_-)> 계획하고 요구분석하는 단계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아쉬움이 있네요.
    ^^ 계속 잘 보겠습니다. ㅎㅎ. +_+) 이거 계속 쓰시다가 책 출간하시겠는걸요!?

    2010/03/22 13:49 [ ADDR : EDIT/ DEL : REPLY ]